다시 배우는 영어|신은경 <KBS뉴스진행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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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긴장된 직장생활 속에 한 군데 맑은 공기같은 기분을 맛볼수있어서 틈을 내 회사 안의 연수원엘 다녔었다. 영어도 배우고 퍼스널 컴퓨터·한글타자·일본어도 조금 배웠다.
한4년쯤 다녔더니, 하루는 그곳에 계신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앞으로 미스 신은 돈내고 다녀요』
물론 기특하게 오래 잘도 다닌다고 농담 섞어 칭찬해준 말일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다녔으면서도 아직 영어 한마디 번듯하게 못해요? 하는 뜻으로 챙겨 들었다. 채찍 삼아.
하긴 그렇다. 동료들 사이에도 연수원 잘가는 것으로 아주 이름나 있고, 대학에서 4년 공부한 것도 영어인데, 어디 가서 『영어 할수 있습니다』하고 명함 내밀수도 없는 형편이고 보면, 그동안 들인 시간에 비해 소득은 너무 없었다. 더우기 남의 나라 말을 배우는데 이렇게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면 묘하게 자존심도 상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지겨운 영어. 그래서 드디어 결단을 내린 것이 아예 그 지겨운 영어 구덩이로 들어가 버리자 하는 것이었다.
외국어 대학교 통역대학원.
고행·지옥·고문·무덤-. 최고로 지독한 표현을 다 동원해도 그 곳의 어려운 공부를 설명할수 없다는 주위 사람들의 얘기였지만 가장 짧은 시간에, 그러나 가장 효과적으로 확실하게 공부할수 있는 곳이라 여겨졌다.
그래선지 입학이 허가되던 날은 솔직이 말해 아나운서 되던날 만큼이나 기뻤다. 오래 전부터 꼴찌로라도 그 학교에 한번 합격만 해봤으면 하고 꾸어 오던 꿈이 오늘 내 앞에 현실이 된 것이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AFKN은 왜 매일 켜놓고 있느냐는 동생들의 애정어린 구박도 그날은 즐겁게만 들리기도 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우습지만, 지난 가을엔 고3처럼 독서실이란 곳에도 가보았다.
학생들은 학교에 가고 텅빈독서실에 재수생처럼 앉아 책을 보며 어느 땐 참 어처구니 없어지기도 했다. 다 늦어서 이게 무슨 주착이람.
내년 3월이면 국민학교 입학하는 어린 꼬마처럼 공책을 마련하고, 연필도 깎고, 새 사전도 사고. 그렇게 새로운 준비를 할 것이다. 콧물을 닦을 손수건을 가슴에 붙일 필요야 없겠지만, 이 뒤늦은 학생은 감격스런 눈물을 감출 손수건은 준비해 둬야 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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