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경제·복지엔 여야가 없음을 보여준 의원 이념조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중앙일보와 한국정치학회가 20대 국회의원 21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정책·이념조사 결과 새누리당 의원의 55%가 법인세 인상에 찬성한다고 답변했다. 야당의 전유물이었던 법인세 인상론에 여당 의원 과반수가 동조한 것이다. 특히 김무성 전 대표, 서청원 의원 등 당을 이끌어온 원로·중진까지 ‘점진적’이란 전제를 달긴 했지만 법인세 인상에 찬성한 건 눈여겨볼 대목이다.

고용·복지에서도 여야 간 수렴현상은 두드러졌다. 비정규직 근로자들에 대해 보호조치를 확대하고 소득수준에 따라 무상보육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새누리당 의원이 10명 중 8~9명에 달했다.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해 온 외교·안보 분야에서도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도입 같은 민감한 사안을 제외하면 중도로의 수렴현상이 드러났다. 북한의 도발이 끊이지 않는 와중임에도 새누리당 의원의 72.8%가 “대북 인도적 지원을 늘려 북한을 개방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응답한 게 대표적이다. 개성공단 폐쇄에 대해서도 새누리당 의원들 상당수가 ‘지나친 조치’라며 야당과 같이 비판적 입장을 보였다. 사회·치안 분야도 마찬가지였다. 수사기관의 도청이나 학교 체벌에 대해 야당은 물론 새누리당 의원들 대부분이 “반대한다”고 답변했다.

이렇게 여당이 야당과 동조화 경향을 보이면서 의원들의 전반적인 이념지수도 4년 전보다 진보 경향성이 강해졌다.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가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대표보다 진보 성향인 것으로 나타났을 정도다. 이 같은 의원들의 의식 변화는 이들을 20대 국회에 입성시켜 준 민심의 변화에 따른 결과일 것이다. 유권자들은 4·13 총선을 통해 성장 일변도 정책에서 벗어나 복지·인권도 챙기라는 분명한 시그널을 보냈다. 이런 민심의 요구에 부응하려면 당파를 초월한 대타협 외엔 길이 없다는 것이 이번 조사 결과 드러났다. 민생엔 여야가 없다는 상식이 재확인된 셈이다. 사회 정의에 대해서도 여야 의원들 간의 인식 격차가 줄어든 게 확인된 점도 의미 있다. 치안을 빙자해 마구잡이 도청을 자행하거나 ‘사랑의 매’란 미명 아래 학생들에게 가하는 체벌은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허용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당파를 초월해 의원들 인식에 반영된 것이다.

정치인과 유권자의 정책 선호를 통해 이념을 파악하는 이념지수는 2002년 중앙일보와 정당학회가 한국 언론 사상 처음으로 개발했고, 이후 지역과 인물 중심의 낡은 정치 패러다임을 정책과 이념 중심으로 전환하는 획기적인 계기가 됐다. 여야는 이번 조사 결과의 의미를 무겁게 받아들여 민생만큼은 초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또 입법 과정에서 인권·법치 등 사회의 상식이 된 가치가 훼손되지 않게끔 하는 데도 손을 맞잡아야 할 것이다.

이번 조사를 보면 상당수 의원들이 당론에서 벗어난 유연하고 현실적인 인식을 갖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야 지도부는 의원들에게 당론을 따르라고 강요만 할 게 아니라 소신에 따라 교차투표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해 민의를 충실히 반영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