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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약한 쟁점…정치력 부재 드러내|가까스로 궤도이탈 모면한 예결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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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국회예결위의 국무총리출석문제를 놓고 극한대결로 치닫던 여야가 파국 한발 앞에서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여당의 역학구조, 야당의 계파정치가 얽혀 한발만 삐끗하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을 이번 사태는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날 하루정도 국무총리를 예결위에 출석시킨다』는 방안을 비장의 최종 카드로 감추고 예결위운영에 임했던 민정당은 실전지휘관 등이 잇달아 상황을 그르치는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이를 바로 감느라 뜻밖의 곤욕을 치르는 꼴이 됐다.
민정당은 당초 신민당이 예결위와 운영위에서 파상적인 개헌공세를 열 것으로 예상했고 예결위를 하루 이틀정도 공전시키더라도 정치공세를 최대한 억제해 정치와 예산을 분리처리하자는 복안이었다.
l8일 예결위가 시작되자마자 신민당의 박용만 의원이 의사진행발언을 통해『개헌공세를 펴기 위해 총리가 예결위에 출석해야한다』고 총리출석요구를 하자, 민정당 측은 물실호기라는 듯 그 말꼬리를 덥석 잡고 역공을 펴기 시작.
총리가 나올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개헌요구를 하기 위해 나오라는 것은 받아줄 수 없다고 총리출석 불가론을 내세우는 한편 운영위에서의 정치판 마저 열어줄 수 없다고 되받아 쳤다.
이때까지는 그런대로 작전대로 진행된 셈.
그러나 19일밤 외부전화를 받은 김종호 예결위원장이 총리출석불가를 카드 아닌 실제방침으로 내세우기 시작한데 이어 20일밤 고위모임에서 출석불가를 결정.
상황이 엉뚱한 방향으로 치닫자 민정당 당직자들은 당황한 눈치. 정순덕 사무총장은 다음날인 20일 당직자 회의에서『총무단 이라는게 1안, 2안, 3안 등 대안을 들고 나와야지 상황설명만 하고 앉아있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애꿎은 정시채 수석부총무에게 대신 화풀이.
이 결과에 가장 놀란 것은 이세기 총무 자신. 이총무는 21일 하루종일 이의장·노대표에게 수습을 요청하고 야당인사까지 만나는 등 동분서주.
○…사태가 이렇게 꼬이자 당 쪽에서는 출석문제를 다시 거론하기가 힘들어졌고, 이재형 의장이 직접 수습에 나서게됐다. 실세로 이의장은 그동안 양당고위당직자와 끊임없는 접촉을 통해 21일 예결위 정상화의 수습방안을 세웠고 문제의 회동이 있던 20일 이의장이 그같은 복안을 모처에 전화로 설명했다는 후문.
이의장은 21일 낮 노태우 민정당대표위원을 만난 자리에서 민정·신민당이 반보씩 물러서는 수습방안을 제시하고는『노대표의 도움이 있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간곡히 청했고 노대표도 이를 승낙.
이의장은 이어 김동영 신민당총무와 총리출석을 의장이 보증하는 수습안을 최종적으로 절충하고는 고위층도 참석하는 언론인간부회의 리셉션에 나갔는데 이 때문에 국회주변에는 한때『이의장이 직접 고위층을 만났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의장실 주변에서는『절대 그런 일은 없다』면서『간접적으로 총리출석의 필요성에 대한「재설명」의 기회를 가졌다』고만 설명.
결국 이의장은 노대표 등 민정당측 협조아래 당외인사를 통해 예결위 수습방안을 전했던 것이고 22일 아침 이 안에 대한 긍정적인 회답을 받아 신민당에 전하게 된 것.
○…예결위정상화가 타결된 22일 신민당은 큰 고비를 넘긴 듯 안도하는 표정.
김동영 총무는『5공화국이 만든 악례를 깨고 예결위 총리출석이란 원래의 관례를 되찾은 것이 성과』라고 자독했고 이중재 부총재는『총리출석요구 역시 넓은 의미의 개헌투쟁에 포함되는 것으로 그 자체 명분이 있었다』고 애써 의미를 부여.
그러나 총리출석을 둘러싼 예결위공전과정을 통해 신민당은 전략부재의 실상을 드러내고 말았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
각 계보의 이해속에「자파이익우선」이란 눈금으로 사태를 측정하는 계보정치의 속성이 정확한 상황판단을 그르치게 했다는 게 이번사건을 부른 가장 큰 요인으로 꼽히고있다.
또 조연하 의원 등의 징계안 등 당내미해결 또는 해결불능상태의 복잡한 사정과 학생·재야 쪽으로부터의 강한요구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쫓기는 듯한」원내전략을 추구한 인상이라는 지적들.
총리출석문제로 예결위가 공전되고 개헌특위가 걸린 운영위마저 열릴 가능성이 없어져 개헌이란 본안문제를 다룰「장」을 잃게되자 신민당의원들 내부에서부터『무조건 들어가야 한다』라는 수군거림이 나왔지만 누구도 드러내놓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신민당은 당초 총리출석을 예결위정상화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지는 않았었다. 큰 원칙은 공전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며 총리출석은 신의와 병행해 계속 주장하고 절충하겠다는 것이 원안이었다.
그러나 민정당연수원 학생농성이 발생하고 김영삼씨가 일본사회당과의 교류 실무대표단파견연기에 몹시 화가 났다는 소문이 전해진 날부터 총리출석원칙으로 둔갑.
그러나 박용만 의원이 의사진핵발언에서『개헌문제를 누구에게 따지란 말이냐』고 예결위의 정치공세의도를 드러내면서부터 민지당 측이 부분출석조차 거부함은 물론, 운영위까지 보이코트하자 신민당 측은 내심 당황하기 시작.
개헌문제가 아닌 총리출석문제로는 농성을 할 명분이 약하지만 농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를 자초한 셈이 됐다.
결국 겉으로는「출석」을 고창 하면서도 실제로는「처음부터 출석」에서「출석하되 바쁘면 중간 이석 허용」-「부분적·제한적 출석」-「마지막날 답변 때만 출석」-「자진출석」 등으로 계속 수세에 몰리다 끝내는 「이재형 의장이 최선을 다한다」는 선으로까지 밀리고 말았다.
○…이번 파문의 전과정을 통해 여야의 정치력이 얼마나 빈약한지 확실히 드러났다는 것이 정가의 중론.
총리출석이란 쟁점미달의 쟁점을 두고 예결위를 나흘이나 공전시킨 것도 설명이 안 되는데다 피차 진의를 파악하고 상황을 끌고 나가는 능력이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이런 상태로 정작 본안문제인 개헌특위안을 두고는 어떤 상황이 벌어지겠느냐고 벌써부터 걱정이 많다.<김영배·허남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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