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미 여군과 성관계한 카투사 강간죄 무죄…계속되는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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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카투사로 복무 중이던 한국 남성이 미 여군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됐지만 무죄가 선고됐다. 자신이 강간했다고 인정했음에도 무죄가 선고돼 논란이 일고 있다.

미군 신병을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하던 카투사 A(22)씨는 지난해 10월 초 한국에 전입온 B(19·여)씨를 알게 됐다. 첫눈에 서로 호감을 갖게 된 두 사람은 카카오톡 메시지 등으로 연락을 주고 받다 스킨십을 가지는 사이로 발전했다. 10월 중순에는 합의 하에 성관계를 갖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말 A씨 숙소에서 두 사람이 함께 영화를 보다 문제가 생겼다. 성관계를 원하는 A씨에게 B씨가 “그만하지 않으면 여기서 나가겠다” 말했는데도 성관계를 가진 것이다. A씨는 “너를 못나가게 하겠다”고 말한 뒤 B씨의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려 잡은 뒤 성관계를 가졌다. 계속 B씨가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자 “내가 지금 너를 강간하고 있는 것이냐”라고 물었고 이에 B씨가 그렇다고 답하자 성관계를 중단했다. 이후 B씨는 A씨가 자신을 성폭행했다며 헌병에 신고했고 군검찰은 A씨를 재판에 넘겼다.

서울동부지법 형사12부(부장 이동욱)는 강간 혐의로 기소된 A씨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했다고 4일 밝혔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원치 않는 성관계를 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피해자가 항거하지 못할 정도로 폭행·협박을 했거나 강제로 성관계를 가질 고의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강간죄가 성립하기 위해선 가해자의 폭행·협박이 피해자를 현저히 곤란할 정도의 강도여야 하는데 거기에 이르지 못했다는 판단이다.

재판부는 근거로 A씨가 적극적으로 B씨에게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점을 들었다. 사건이 발생한 A씨의 숙소는 잠금장치를 하더라도 돌리면 자동으로 열고 나갈수 있는 구조였고 같은 층에 다른 부대원의 숙소 11개가 있어 구조요청이 쉬운 곳이었는데도 소리를 지르는 등의 행위가 없었다는 것이다. 또 A씨가 B씨의 바지와 팬티를 강제로 벗기지 않았다고 주장한 부분도 신빙성을 인정했다. A씨는 헌병 조사 때부터 “B씨 바지를 벗기려고 지퍼를 풀었으나 허리와 엉덩이가 뚱뚱해 내릴 수 없어 B씨가 스스로 무릎까지 바지와 팬티를 내렸다”고 주장해 왔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체격과 당시 청바지를 입고 있던 사정 등을 고려할 때 신빙성이 있다”며 “또 A씨가 자세가 불편하다고 말하자 위치를 바꿔준 점 등을 고려하면 강제성이 있었다고 보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A씨가 B씨에게 성관계 후 무릎을 끓고 사과하거나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면서 수차례 “내가 너를 강간했다”고 말한 점, 수사기관에서 혐의를 인정하는 취지로 진술한 점을 감안하면 법원이 강간죄에 적용되는 강제성의 영역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해석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법원은 A씨가 원치 않는 성관계를 강간죄로 착각했기 때문에 그 같은 진술을 한 걸로 판단했다.

┃대법원 판례도 ‘강제성’ 유무 중시..기준 개선에 대해선 전문가들도 의견 갈려

대법원 역시 이처럼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성관계를 맺었는가 보다는 폭행·협박 등을 통한 강제성이 있었는지,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상황’이었는지 등을 성폭행 혐의의 기준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 9월, 성관계 도중 피해자로부터 “오빠 이건 강간이야”라는 말을 듣고 곧바로 행위를 중단한 최모(26)씨에게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한 것도 비슷한 사례로 꼽힌다. 당시 법원은 피해자가 성행위 중단 후에 휴대전화 메시지를 주고 받았고, 최씨의 차를 타고 함께 이동하는 등의 정황을 봤을 때 “최씨가 반항을 억압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유형력으로 성폭행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피해자 의사에 반해 성행위를 했지만, 강간으로 보기는 힘들다고 본 것이다.

이런 법원의 기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여성단체나 법조계 일각에선 협소한 기준을 버리고 피해자의 의사를 중요하게 봐야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계속되고 잇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아직까지도 폭행과 협박 유무가 강간죄 성립 조건이라고 보는 법원의 시각은 시대에 뒤쳐진 것”이라며 “객관성과 합리성이란 이름으로 피해자의 경험을 무시하는 이런 협소한 시각 때문에 성폭력 신고율이 10%밖에 안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김지미 사무차장 역시 “성폭력에 관한 법들의 보호법익은 성적 자기결정권인데, 현재와 같이 물리력이 수반돼야 성폭력이라고 보는 것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반면 “이런 사건의 경우 법원이 지금과 같이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도 있다. 김희환 변호사는 “강간죄는 대부분 실무적인 증거가 없고, 피해자는 물론이고 피의자에게도 심각한 사회적 영향을 미치는 만큼 엄격한 절차적 조건을 지키고, 무죄추정의 원칙 등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고 말했다. 기준을 바꿔야한다고 말한 김 사무처장 역시 “이 문제를 두고 개별 법원을 탓하긴 어렵다”며 “흔히 ‘꽃뱀’이라고 말하는 부작용 등 우려되는 게 사실인 만큼 사회적인 논의를 거치고 국회 차원에서 신중하게 논의해 법을 바꿔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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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일각에선 “미국 등 일부에선 성관계에 대해 명시적인 동의가 없으면 성폭행으로 판단하는 곳도 있지만, 명시적 동의를 주고 받는데 익숙하지 않은 동양적 문화권에선 이런 법적 기준을 그대로 받아들이긴 어려운 측면도 있다”며 “개선이 필요한 건 맞지만 신중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도 내놨다.

한편 A씨를 기소한 검찰 관계자는 “B씨의 상관이었던 A씨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취지로 말했는데도 강제성이 없었다고 본 법원의 판단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며 “항소심에서 피해자가 심리적으로 위축돼 반항하기 어려웠다는 점을 주장해 한번 더 판단을 받아보겠다”고 말했다.

박민제·서준석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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