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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22. 일제 시대의 기생-허동현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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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강산은 좋은데 이쁜 다리들은 털난 딸라(달러)들이 다 자셔놔서 없다." 저항시인 신동엽의 시 '발'의 한 구절입니다.

이와 비교해볼 만한 것으로, 미국의 저명한 한국현대사 연구자 브르스 커밍스의 '양지의 한국현대사(Korea's Place in the Sun)'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보입니다.

"장사란 도덕과 무관한 교환일뿐 더도 덜도 아니다. 한 곤궁한 한국여인이 동두천의 무심한 어둠 속에서 흑인병사를 찾는다면 그것은 자본주의다. 그 여자가 그 흑인과 결혼해 미국으로 건너가 7명의 자녀를 낳아 기르고 마침내 한 도시의 대형병원에 소속된 모든 간호사의 수장이 된다면 그것은 생존, 고된 노동, 윤리적 행동의 소산이다."

'양공주'라 불리는 여성을 놓고, 한편에선 외세와 자본에 짓밟힌 희생자로 보고, 다른 편에선 미국 이주와 사회적 신분 상승의 계단으로 활용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기생들은 사대부의 '말귀를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의 해어화(解語花)로 불렸습니다. 몇몇 기생들이 양반 남성들의 지배구조를 조롱하는 한시와 시조를 남겼다 해도, 양반문화에 기생하는 존재인 그들이 깨어 있는 주체가 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다가 "이 양반이, 저 양반이" 하며 시비를 다툴 만큼 양반이 3인칭 대명사가 되어버린 일제시대에 "개쌍놈의 아들이라도 황금만 가졌으면 일류 명기를 하룻밤에 다 데리고 놀 수 있게 된 기생의 민중화"시대가 열렸고, 이러한 세태 속에서 근대주의자들은 기생을 '노예매매제의 유물'이자 '가정의 파괴자'라고 규탄하기도 했습니다(한청산, '기생철폐론', '동광', 1931년 12월).

박노자 교수 지적대로 기생들은 권위주의적인 근대화 과정에서 짓밟힌 희생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그들은 남성 지배 사회와 식민지라는 이중의 질곡 아래에서 당당히 자기 목소리를 내고 운명을 개척해나가며 근대국가 건설을 염원한 또 한 명의 국민이자 남녀 동권운동의 선구였으며, 나아가 대중문화의 새로운 주체이기도 했습니다.

국망(國亡)을 몇 달 앞둔 1910년 5월 대구 기생들이 국가 발전을 위해 학업 발흥과 군사 양성 중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주제로 토론회를 열려 했다는 기사(대한매일신보)나, 19년 3.1운동 때 수원.해주.진주.통영 등지의 기생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한 사실이 이를 입증합니다.

30년대 들어 카페 여급으로 '진화'한 기생의 후예들은 조선 청년들의 가슴에 독립사상을 일깨운 '불령선인'(不逞鮮人:독립운동을 하는 불온한 조선인)이자 '불령스타'로 경찰의 감시 대상이지 않았습니까?

또한 그들은 마음을 파는 신사들보다 살을 파는 기생 생활이 못하지 않다는 자기 정체성을 갖고, "여성의 인간성을 제약하여 남성들의 완구, 씨(받이)통을 만드는"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에 반항한 주체적 인간들이었습니다(화중선, '기생생활도 신성하다면 신성합니다', '시사평론', 23년 3월).

"우리도 눈을 떴습니다. 우리도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사회적으로 평등적으로 살아보겠다는 부르짖음! 그의 첫소리가 '장한(長恨)'이란 우리의 기관잡지로 인하야 울리기 시작했습니다"라고 외친 기생 김채봉의 '첫소리'('장한'1, 28년 1월)를 보면 이러한 각성이 비단 몇몇 기생들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허동현 경희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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