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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앞길 밝혀주신 "등불"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김익달형! 형과 나는 70평생을 서로 돕고 서로 아끼며 살아오던 사이였건만, 이제 유명을 달리하여 형의 영전에서 마지막 고별사를 올리게되니, 이 무슨 통절한 슬픔이옵나이까. 형은 사업상으로나 일신상에 무슨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나를 불러 모든 것을 숨김없이 상의해주셨고, 나 역시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형의 도움을 청했던 우리가 아니었습니까.
김익달형! 돌이켜보면 형의 일생은 선구자의 일생이었고, 고행길의 일생이셨습니다. 빈한한 농가에서 태어난 형은 어렸을 때 청운의 뜻을 품고 고향을 떠나, 일본 동경에서 신문을 배달해 가면서 학업에 정진했습니다.
8·15해방이 되고 형은 출판계에 투신하여 학원사를 창건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대백과사전을 비롯하여 많은 양서들을 연달아 발간해오시면서 1952년에는 학생잡지 「학원」을 창간하셨습니다. 그 때만해도 사회가 혼란하여 청소년학생들은 갈 바를 몰라 방황하던 시대였던지라, 「학원」지는 사회의 등불이 되어, 젊은 학생들에게 인생의 진로를 명시해 주었던 것이 아니옵니까.
더구나 형은 문학계의 창달에 기여하고자 「학원문학보제도」를 신설하여 많은 학생들을 문화와 문학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그후에도 형은 여성문화의 향상을 위해 1955년에는 해방 후 최초의 여성잡지인 「여원」을 발간하고, 66년에는 가정주부들을 위한 「주부생활」이라는 잡지를 새로 발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형은 한국잡지계의 개척자이며, 출판계의 불사신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형은 출판사업의 성공에만 만족치 않고, 『나의 염원은 출판에서 얻어진 돈으로 많은 인재를 사회에 양성해 보내는데 있다』고 항상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더니 지금부터 30여 년전에 거액의 기금을 내어 「학원장학회」라는 독립된 장학재단을 발족시켜 전국에서 우수학생을 길러냈습니다. 이제 형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영원히 떠나가셨습니다. 그러나 형이 이승에 남겨놓으신 가지가지 업적들은 사회와 더불어 길이길이 빛날 것이옵니다.
그리고 뒤에 남은 유족들과 학원사 사원일동은 형의 고매하신 유지를 고이 받들어 날로 발전시켜 나갈 것입니다. 형이시어, 부디 편히 잠드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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