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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월요일] 국내서도 수제맥주 열풍…쌉싸름 페일에일, 향 깊은 IPA, 상큼한 세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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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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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로 일하다 수제맥주 펍 ‘더부스’를 차린 김희윤 대표. [사진 임현동 기자]

‘맛있는 맥주 한 잔’의 여파는 컸다. 한의사로 일하던 김희윤(29) ‘더부스’ 대표는 2012년 우연히 들른 수제맥주 펍에서 ‘지리산 IPA’라는 맥주를 맛본 순간을 지금도 기억한다. “어, 이건 뭐지? 그동안 마셔본 맥주와는 전혀 다른 풍부한 맛에 깜짝 놀랐어요.” 그날 이후 또 다른 맛을 찾아 국내외 수제맥주 펍과 양조장을 찾아다니는 ‘맥덕’(맥주+덕후)의 길에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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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부스’ 경리단점 내부. [사진 임현동 기자]

2013년 “한국 맥주는 북한 대동강 맥주보다 맛없다”는 칼럼을 썼던 전 이코노미스트 기자 다니엘 튜더, 당시 남자친구였던 남편 양성후(29)씨와 함께 이태원 경리단길에 수제맥주 펍인 ‘더부스’를 열었다. “사람들이 모르는 새로운 맛을 소개하고 싶었어요.” 2년이 지난 지금 ‘더부스’는 6개의 수제맥주 펍을 운영하며 80여 종의 외국 수제맥주를 수입·유통하는 회사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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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메이징 브루잉 컴퍼니’의 독자 레시피로 만든 수제맥주들. [사진 임현동 기자]

지난 22일 서울 성수동의 수제맥주 펍 ‘어메이징 브루잉 컴퍼니’는 이른 저녁인데도 손님으로 붐볐다. 지난 4월 문을 연 이곳은 요즘 맥주 매니어들 사이에서 ‘핫 플레이스’로 꼽힌다. 매장 바로 옆 양조장에서 직접 제조한 5종의 수제맥주를 포함해 60여 종에 달하는 국내외 수제맥주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던 김태경(36) 대표가 국내 홈브루잉 대회에서 여러 차례 우승한 양조전문가 스티븐 박(29)과 함께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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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메이징 브루잉 컴퍼니’ 김태경 대표. [사진 임현동 기자]

크래프트 비어(Craft Beer), 수제맥주 열풍이 거세다. 비슷비슷한 맛의 맥주가 아닌, 자신의 입맛에 딱 맞는 풍미를 지닌 맥주를 찾아 즐기는 사람이 늘고 있다. 3~4년 전만 해도 서울 이태원이나 홍대 인근 등에만 있던 수제맥주 펍은 도심 곳곳으로 퍼져 나가는 중이다.

맑고 가벼운 1세대 독일식 라거 지고
향 풍부한 영미식 에일맥주 늘어나
재료·발효방식따라 수천 가지 맛
지역 특색 살린 감귤맥주도 나와

특히 2014년 주세법 개정으로 소규모 양조장 맥주의 유통이 가능해지면서 중소 규모의 맥주 양조장이 전국적으로 50여 개까지 늘어났다. 현재 국내 맥주시장에서 수제맥주 비중은 0.5~1% 정도. 하지만 업계 관계자들은 수년 내 점유율이 5%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한다.


# 내 취향에 딱 맞는 나만의 맥주



흔히 ‘매장에서 직접 만들어 파는 생맥주=수제맥주’라고 알고 있지만 수제맥주의 범위는 그보다 넓다. 국내에는 명확한 기준이 없지만 미국 양조장·펍들의 연합체인 BA(Brewers Association)에서는 ▶연간 600만 배럴(약 9억5340만L) 이하 생산 ▶거대 자본 참여 25% 이하 ▶전통적인 재료와 방식을 고수하는 양조장에서 만들어진 맥주만 수제맥주로 규정한다.

국내에서는 2002년 소규모 맥주 제조 면허가 도입되면서 수제맥주 시장이 열렸다. 매장에서 직접 맥주를 만들어 판매하는 ‘하우스 맥주’ 펍이 이때 생겨났다. 2010년대 들어 수입맥주 시장이 커지고 수제맥주의 일반 유통이 가능해지면서 해외에서 다양한 수제맥주를 경험한 젊은 층이 시장에 속속 뛰어들었다.

‘어메이징 브루잉 컴퍼니’의 김태경 대표 역시 미국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하던 시절 수제맥주의 매력에 빠진 케이스다. “마트에만 가도 수백 가지의 맥주가 있더라고요. 이렇게 다양한 맛의 맥주를 만들 수 있구나 하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1세대 ‘하우스 맥주’는 독일식 라거(Lager)가 주를 이뤘다면 현재 한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수제맥주는 영국이나 미국식 에일(Ale)이 대부분이다.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라거 맥주가 맑고 가벼운 느낌이라면 에일은 재료의 향이 풍부하게 느껴지고 맛이 비교적 강하다. 특히 쌉싸름한 맛의 페일에일(Pale Ale)이나 홉의 향이 강한 IPA(인디아 페일에일), 알코올 도수가 8% 정도로 센 스타우트(Stout), 벨기에 에일 맥주인 세종(Saison) 등이 인기를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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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귤맥주를 개발한 ‘제주지앵’ 문성혁 대표. [사진 임현동 기자]

미국의 로컬 맥주나 일본의 ‘지비루(地ビ?ル)’처럼 지역 특색을 살린 수제맥주를 개발하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제주도 감귤 성분을 넣은 에일 맥주인 ‘감귤맥주’를 만든 ‘제주지앵’의 문성혁(25) 대표는 미국 하와이에서 생산되는 ‘코나(Kona) 맥주’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 지역에서만 맛볼 수 있는, 지역 특유의 풍미를 살린 수제맥주가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제주도 출신인 문 대표는 고교 동창인 강규언씨와 함께 2015년 감귤 껍질의 쌉싸름한 맛을 담은 맥주를 개발해 호평을 받았다. 올해 제주도에 자체 양조장을 건립하고 7월부터 본격적인 생산에 나설 예정이다.


# 색깔과 향, 목넘김까지 즐기세요



이들이 말하는 수제맥주의 매력은 무엇보다 ‘다양성’이다. 김희윤 대표는 “맥주는 맥아와 물, 홉과 효모가 만들어내는 예술”이라며 “재료를 어떻게 배합해 어떤 온도에서 얼마나 발효시키느냐에 따라 수천, 수만 가지의 맛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문성혁 대표도 “맥주는 술보다는 하나의 요리 같다. 똑같은 레시피를 갖고 요리해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른 맛이 나오 듯 맥주도 ‘손맛’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했다. 수제맥주를 마실 땐 오감을 활짝 열어놓고 향이나 색깔, 거품의 부드러움, 쌉쌀한 풍미 등을 충분히 즐기라고 권하는 이유다.

음식과의 ‘마리아주(mariage·배합)’를 고려하는 것도 수제맥주를 맛있게 먹는 방법 중 하나다. 과일향이 강한 세종 맥주에는 상큼한 샐러드가, 바비큐 요리에는 다소 묵직한 브라운 에일(Brown Ale)류가 어울린다. 느끼한 음식에는 신맛이 사는 사워 에일(Sour Ale)을 곁들이면 위의 부담이 한결 줄어든다. 한국식 프라이드 치킨에는 몰트맛이 강한 페일에일이 잘 맞는다. 이미 유럽이나 미국의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메뉴판에 음식과 어울리는 맥주 리스트도 제공하고 있다.

수제맥주 시장에 뛰어든 젊은 사업가들은 한국 수제맥주가 세계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보였다. ‘더부스’는 경기도 판교에 있는 자체 브루어리로는 생산량이 부족해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의 양조장을 인수해 9월부터 미국에서도 맥주를 생산한다.

김희윤 대표는 “이곳에서 만든 맥주를 캘리포니아 지역에 있는 펍을 시작으로 미국 전역에 소개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김태경 대표는 “맛있는 와인은 한국에서 만들기 어렵지만 맛있는 맥주는 충분히 만들 수 있다”며 “아직 시작 단계지만 머지않아 외국에서도 호평받는 한국산 수제맥주가 나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음식상식 맥주 ‘맛있는 온도’ 라거는 5~10도, 에일은 8~15도

‘맥주는 시원하게 마셔야 제맛’이라지만 무조건 차갑다고 좋은 건 아니다. 맥주 종류마다 맛이 살아나는 최상의 온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라거 계열은 5~10도 정도, 에일 계열은 8~15도 정도에서 가장 풍부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맛이 강한 스타우트는 최소 12도는 돼야 본연의 맛이 난다. 너무 차가운 맥주가 나왔다면 손으로 잔을 감싸 온도를 올린 뒤 마시는 것도 좋다.

글=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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