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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경·맞춤형 보육 등 난제 해법 찾는 유일호와 3당 의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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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5호 7 면

일러스트=강일구 ilgook@hanmail.net

지난 24일 정부와 새누리당은 국회에서 당정 간담회를 열고 추가경정예산(추경) 등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을 논의했다. 이날 유일호 경제부총리가 “추경을 하려면 국회에서 다음달 중으로는 처리해 줘야 한다”고 당부하자 새누리당 김광림 정책위의장은 “적극적으로 하겠다”고 답했다. 그동안 새누리당은 추경에 소극적이었고 김 의장 역시 최근까지 “세금이 잘 걷히고 있는 상황에서 추경은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한 달 전까지 불투명했던 추경에 이렇게 속도가 붙고 있다.


반전의 작은 단서는 이보다 8일 전에 열린 ‘민생경제 현안 점검회의’ 2차 회의에서 찾을 수 있다. 16일 오후 3시 국회 귀빈식당에 유 부총리와 여야 3당의 정책위의장이 모였다. 새누리당 김광림·더불어민주당 변재일·국민의당 김성식 정책위의장이 민생경제를 살리자며 머리를 맞댄 자리다. 참석자와 배석자들의 전언을 종합하면 회의에선 이런 취지의 대화가 오갔다.


▶김성식=“울산·부산·거제·통영·목포 등 남해안 벨트가 경기 침체와 구조조정으로 초토화됐습니다. 정부가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을 짜야 합니다. 민생 추경이 필요합니다.”


▶유일호=“추경을 하면 재정 건전성이 악화될 수 있어요. 추경 이외의 대안을 고민하고 있어요.”


▶김성식=“그럼, 추경은요? 여기서 협의합시다.”


이 대목에서 새누리당이 정부를 엄호하고 나섰고, 더민주도 추경엔 부정적 뉘앙스였다.


▶김광림=“추경은 시기상조예요. 이번 에 추경을 하면 이 정부 들어 벌써 세 번째고 국가 채무가 200조원이나 늘어났는데.”


▶변재일=“추경할 여지가 있다면 채무를 줄여야지 경기 부양을 위한 추경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우선 정부가 (조선해운업 구조조정 실패에 대해) 사과를 하고 국책은행의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김성식=“아니, 국민이 다들 우리만 쳐다보고 있는데 경기가 이 정도로 어려우면 추경을 해야 됩니다. 야당이 이렇게 먼저 제안까지 했으니….”


▶유일호=“그럼, 검토는 해 보겠습니다.”


▶김광림=“그럼, 이렇게 정리하죠. 대규모 실업 가능성이 국가재정법상 추경 요건에 해당하는지 검토하는 걸로.”


3시간에 걸친 회의가 끝난 뒤 발표문엔 ‘대외 여건 악화와 구조조정으로 인한 어려운 고용경기 상황을 감안할 때 적극적인 재정정책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 관계자는 “내심 추경 카드도 고려하고 있었는데 새누리당이 부정적이라 힘들다고 봤다. 보통 정부가 추경을 말하면 야당은 ‘재정계획에 실패했다’고 비판부터 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국민의당의 적극적인 태도는 의외였다”고 말했다.


함께 미국 유학·관료 근무 인연유일호·김광림·변재일·김성식 네 사람의 조용한 협치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떠벌리지 않고 튀지 않게, 돌다리를 두드리는 듯하지만 실험은 꽤 내실 있게 이어지고 있다. 추경의 물꼬를 튼 ‘민생경제 현안 점검회의’, 이 회의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는 지난달 13일 박근혜 대통령과 여야 3당 원내지도부의 회동에서 나왔다. “협의체라도 만들어 합의 가능한 문제부터 접근해 보자”는 김성식 의장의 제안이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5월 20일 상견례를 겸한 1차 회의가, 이달 16일에 2차 회의가 열렸다.


2011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나 2014년 기초연금 문제 등 특정 현안이 불거졌을 때 여·야·정 협의체가 한시적으로 가동한 적은 있지만 상시 가동은 이번이 처음이다. 회의가 굴러가게 만드는 건 ‘합의가 가능한 문제부터’와 ‘20%씩은 양보해야 한다’는 두 가지 원칙 덕분이다. 욕심을 부려선 안 되며, 그렇다고 맹탕이 돼서도 곤란하다는 데 네 사람의 의견이 일치했다. 청와대 회동에서도 야당의 두 의장이 “회의가 성과를 내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제안하자 박 대통령이 수긍했다고 한다.


서로의 공감대를 넓혀 보자는 취지에서 정부의 거시경제 관련 보고도 이뤄졌다. 지난 16일 2차 회의 때 이찬우 기획재정부 차관보는 15분에 걸쳐 현재의 거시경제지표와 하반기 재정운용계획을 자세히 보고했고, 야당 측은 만족스러워했다.


당초 정부는 우리 거시경제의 속살을 그대로 보고하는 데 소극적이었지만 김성식 의장이 “정부의 정책기조가 뭔지 도대체 모르겠다”고 하고, 새누리당의 김광림 의장까지 “거시경제 보고가 중요하다”고 거들면서 성사됐다. 더민주 변재일 의장은 “지금까지 야당은 거시경제엔 관심이 없고 정부의 현안 대응에 대한 비판만 했는데 이 회의에서 상황 브리핑을 받아 보니 우리 경제가 얼마나 어려운지 공감하고 자연스럽게 대안을 함께 고민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당사자들 간의 인연과 스킨십은 회의의 윤활유다. 변재일 의장은 유일호 부총리와 미국 유학(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생활을 함께해 정치에 입문하기 전부터 속내를 터놓고 지냈다. 김광림 의장은 기재부 예산실 과장 시절 국무조정실에 근무하던 변 의장과 업무 교류를 했고, 노무현 정부에서 함께 차관이 됐다. 김광림 의장과 김성식 의장은 18대 국회에서 같은 당(당시 한나라당) 소속 기획재정위원회 동료였다. 김광림 의장은 “4명 모두 서로 잘 아는 사이라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얘기가 통한다”고 했다.


성과를 높이기 위해 회의 운영방식도 다양하게 실험 중이다. 1차 회의 때 “배석자가 너무 많아 허심탄회한 대화가 어렵다”는 데 공감한 뒤 2차 회의에선 배석자를 2명씩 제한하고 모두발언만 공개했다. 다음달 중순으로 예정된 3차 회의에선 모두발언조차 없이 완벽한 비공개로 진행할 예정이다. 또 3당의 의장이 번갈아 가며 간사를 맡는다. 간사는 회의 날짜와 의제 조정, 회의 결과 브리핑까지 주관한다. 첫 회의는 김광림 의장, 두 번째는 변 의장, 다음달 회의는 김성식 의장이 간사다.


기구의 성격을 ‘협의체’로 한 건 “특정 의제에 매몰되지 않고 논의를 유연하게 이끌어 가자”는 생각에서였다. 어차피 중요한 결정과 합의는 각 당의 대표나 원내대표들 레벨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정책위의장은 ‘충실한 협의’를 통해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분위기와 조건을 만들자는 데 공감했다.


하지만 반대로 ‘협의체이기 때문에’ 갖는 한계도 분명히 있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이 회의의 가능성과 한계가 명확하게 드러난 건 최근 논란이 된 맞춤형 보육 문제에서였다.


서별관회의 청문회가 걸림돌 될 수도16일 회의에서 야당의 두 의장은 처음엔 누리과정(만 3∼5세 무상보육) 이야기를 꺼냈다. “시·도 교육청이 누리과정 예산 편성이 어렵다고 아우성이다. 하반기에 보육대란이 있을지도 모른다. 누리과정 예산을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정부와 새누리당 역시 지자체가 예산을 자체적으로 조달해야 한다는 기존의 입장만 반복했다. 묵은 쟁점에 대해 갑자기 의견이 모아질 리 없으니 야당 측은 “누리과정은 일단 넘어가고 발등의 불인 (0~2세에 대한) 맞춤형 보육 얘기를 해 보자”고 제안했다. ‘합의 가능한 문제부터 해결하자’는 취지대로였다.


당초 ‘맞춤형 보육 7월 1일 실시’에 반대했던 야당 측은 이 자리에서 ▶기본 보육료 유지 ▶종일반 대상 완화(다자녀의 기준을 당초 ‘세 자녀 이상’에서 쌍둥이와 연년생 등 ‘두 자녀 일부 포함’) ▶학부모의 취업 증빙 절차 간소화 등 보완책 마련에 동의했다. 야당 의장들이 어린이집 측의 요구사항을 전하자 김광림 의장이 “지금까지 나온 얘기를 종합해 보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며 합의를 이끈 덕분이다. 여기까지는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후에 터졌다. 보건복지부는 “야권이 예정대로 시행하는 것에 동의했고 보완책에 대해 함께 검토하기로 했다”고 발표했고, 야당은 “보완책을 갖고 당사자들과 충분히 상의하라고 한 것이지 7월 1일 시행에 동의한 적은 없다”고 맞섰다. 의견을 모으고도 결정적인 순간엔 당리당략에 따라 해석을 달리할 수밖에 없는 ‘협의체’기구의 한계였다.


정의당까지 야 3당이 공동 추진 중인 청와대 서별관회의 청문회도 ‘민생경제 현안 점검회의’의 순항에 영향을 줄 변수로 꼽힌다.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공적 자금 지원 문제 등 현 정부 경제정책 결정 과정의 뇌관을 파헤치는 서별관회의 청문회가 열릴 경우 경제사령탑과 여야 3당 정책위의장이 구조조정 문제 등을 논의하는 ‘민생경제 현안 점검회의’의 순항을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더민주 변 의장은 중앙SUNDAY와의 통화에서 “서별관회의 청문회가 열리더라도 참석자들끼리 입을 맞추고 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두긴 쉽지 않은데…”라고 말했다. 어차피 청문회를 열어도 별 소득이 없을 텐데 왜 굳이 추진하는지 탐탁지 않다는 뉘앙스였다.


하지만 이 같은 한계와 변수들에도 불구하고 ‘민생경제 현안 점검회의’ 실험에 대한 기대감은 정치권 안팎에서 표출되고 있다. “협치의 성공적인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다.


윤창현(전 한국금융연구원장)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정부와 새누리당의 입장에선 정책의 결과가 잘못되더라도 야당과의 공동 책임으로 위험 부담을 줄일 수 있고, 야당으로서는 국정의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윈-윈 구조”라며 “협치에 왕도는 없다. 정부와 여야가 더 자주 만나고 더 많이 협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중앙SUNDAY와의 통화에서 3당 정책위의장들은 “설사 합의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서로의 의견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 왜 합의가 안 되는지,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알고 조율하는 것 자체가 협치에 다가서는 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어려움이 있더라도 계속 가 보겠다”고 말했다. 특히 김성식 의장은 “협치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청와대의 의지”라며 “청와대가 지금보다 조금만 더 유연하면 ‘민생경제 현안 점검회의’의 성공은 대단히 희망적”이라고 했다.


이철재·추인영 기자chu.i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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