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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성을 질러 보라, 인생이 그만큼 풍부해질 테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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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5호 8 면

2010년 상하이 엑스포 당시의 영국관 내부(아래 사진)와 외부 모습. 6만6000개의 아크릴 막대 끝에는 전 세계에서 공수 받은 씨앗 25만종이 골고루 담겨 있다. 디뮤지엄 전시장에는 1만3000개의 아크릴 막대로 만든 축소판(위 사진 오른쪽)이 전시돼 있다. ⓒIwan Baan

영국 디자인계의 거장인 테런스 콘란 경이 “우리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극찬한 토마스 헤더윅(47)과 그가 이끄는 헤더윅 스튜디오의 ‘세상을 변화시키는 발상’ 전시가 10월 23일까지 서울 한남동 디뮤지엄에서 열린다. 토마스 헤더윅은 크리스마스 카드·가구 디자인부터 건축·도시설계까지 폭넓은 분야에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펼쳐보이고 있는 세계적인 디자이너다. 25만 개의 씨앗을 담은 7.5m 길이의 투명 아크릴 막대 6만6000개로 지은 2010 상하이 엑스포 영국관은 ‘씨앗 성당’으로 불리는 그의 대표작. 50년 만에 새롭게 옷을 갈아입은 런던의 2층 버스, 204개의 성화봉으로 꽃다발 모양을 만든 2012년 런던 올림픽 성화대도 헤더윅의 작품이다.


어려서부터 뭔가를 만들기 좋아했던 그는 늘 남들과는 다른 생각에 몰두했다. ‘아이스크림은 왜 작은가’ ‘새로 지은 건물들은 왜 불쾌감을 주는가’ ‘저 의자를 지금보다 더 낫게 만들 수는 없을까’. 꼬리의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질문을 스스로 해결해보려던 소년은 현재 자신이 이끄는 200명의 스튜디오 팀원들과 함께 누구도 생각 못했던 디자인 예술을 현실에 구현하고 있다. 전시 준비를 위해 내한한 토마스 헤더윅을 15일 중앙SUNDAY S매거진이 만났다.

1 2015년 완공된 싱가포르 난양 과학기술대학 ‘러닝 허브’ 빌딩 모형물. 12개의 둥근 원통이 꽃다발처럼 묶여 있어 인상적이다.

2 2014년 건축한 영국 ‘봄베이 사파이어 증류소’ 모형도. 1761년부터 전통 레시피를 고수하며 10종의 열대·지중해 식물을 가미해 술 봄베이 사파이어를 만드는 영국 온실 전통 건축양식을 따랐다.

3 2000년 런던 파터노스터 광장에 세워진 전기 변전소 냉각 통풍구의 모형.

검정바지에 흰색 셔츠, 금발의 곱슬머리를 한 토마스 헤더윅은 장난꾸러기처럼 보였다. 질문에 답할 때마다 연극 무대에 선 아이처럼 두 손과 온몸을 이용해 열정적인 제스처를 해보였다. “어제 인사동을 지나다 전통 옷가게에서 산 바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지 밑단의 꽃무늬를 보여주기도 했다.


-한국 첫 방문 소감은. “어머니가 앤티크 가게를 하셔서 어려서부터 낡은 캐비닛, 유리 공예품이 익숙했고 주변에 공예 장인들이 많았다. 어제 인사동을 둘러봤는데, 한국은 장인정신이 뛰어난 나라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현재 나와 스튜디오 식구들은 캘리포니아 마운틴 뷰에 위치한 구글 신사옥을 작업중이다. 2만 명의 직원이 사용할 건물인데 우린 인간적이면서도 장인정신이 밴 건축을 구상중이어서 이번 한국 방문이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


-디자이너로서 추구하는 철학은 무엇인가. “일상에서 미처 예상치 못했던 탁월한 매력을 창조하는 일이다. 전혀 생각지 못했는데 ‘야, 이거 멋지다’라고 탄성을 지르게 되는 경험은 인생을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디자인에 영향을 준 멘토가 있나. “운 좋게도 테런스 콘란 경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석사과정 때 그를 찾아가 5분만 시간을 내달라 부탁했더니 흔쾌히 집으로 오라고 했다. 3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눈 후에는 자신의 집에 와서 살라고 하더라. 덕분에 내 첫 건축 프로젝트를 하는 동안 그의 작업실을 활용할 수 있었다.”


-콘란 경의 어떤 철학이 영향을 미친 건가.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 유일하게 옳은 질문을 하는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디자이너나 건축가들은 ‘세상이 왜 이걸 원하지’라고 묻지 않는다. 그저 ‘이건 각을 좀 더 살려야 할 것 같아’ ‘그 빛깔은 안 맞는 것 같아’라는 말만 할 뿐이다. 반면 콘란 경은 ‘사람들이 왜 그것을 원하는지, 그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취향과 소득 수준은 어떤지’ 소비자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하고 디자이너 스스로가 그것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줬다. 그가 시작한 인테리어 숍 해비타트를 통해 우리가 사는 집에 실용적이면서도 고급스러운 시대감각이 들어올 수 있었다. 이케아의 창립자는 대놓고 ‘해비타트를 모방해 사업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4 배터리와 동작체크 센서로 스스로 회전하는 ‘스펀 훌라’ 체어. 디자이너 토마스 헤더윅이 결정적 영감을 줬던 훌라후프 동작을 취하고 있다.

5 2012년 토마스 헤더윅이 디자인한 런던버스의 실제 앞부분을 전시했다. 버스를 탄 사람의 동선을 따라 사선으로 난 창문과 모서리의 둥근 곡선이 특징이다.

[소비자에 대한 질문을 끝없이 하라] 디뮤지엄의 ‘세상을 변화시키는 발상’ 전시장 초입에는 맨체스터 폴리테크닉 대학교에서 3D 디자인을 공부하고, 영국 왕립예술학교에서 가구 디자인으로 석사과정을 밟던 때 헤더윅이 만든 작품 모형과 스케치,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테런스 콘란 경과 함께 찍은 사진도 볼 수 있다.


이어지는 전시실은 크게 3가지 주제로 나뉜다.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를 디자인 과정 전반에 걸쳐 질문과 분석을 반복해가며 어떻게 구체화시키는지 보여주는 ‘생각(Thinking)’, 그것을 현실로 옮기기 위해 어떤 실행 작업을 하는지 설명해주는 ‘만듦(Making)’, 단순히 미적이거나 실용적인 것을 넘어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도록 독특한 개념을 찾아내는 과정인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다. 각각의 주제마다 아이디어 스케치, 모형물, 영상, 사진 등이 가득하다.


특히 나무·금속·유리·스티로폼 등의 소재를 기존 개념과는 다르게 사용하고, 기존의 시스템에서는 그것을 현실적으로 구현할 수 없어 스튜디오에서 직접 수작업으로 만들어내는 아이디어는 놀랍기만 하다.


그 중에는 2010년 상하이 엑스포에서 선보인 ‘씨앗 성당’ 조형물도 포함돼 있다. 이번 전시를 위해 1만3000개의 아크릴 막대로 원형을 축소한 것인데 이것 자체로도 충분히 예술적이다. 앞에는 큐 왕립식물원과 밀레니엄 종자 은행의 도움으로 전 세계에서 25만 개의 씨앗 공수 받아 담아 놓은 실제 아크릴 막대도 전시돼 있다.


전시장 맨 마지막 방에는 ‘스펀 훌라’ 의자 20여 개가 놓여 있다. 관람객이 직접 앉아보고 돌려도 볼 수 있도록 한 체험 존이다. 스펀 체어는 심벌즈나 레코드판을 만들 때처럼 금속판을 형틀과 함께 회전시켜 입체적인 형태로 가공하는 스피닝 공법으로 만들었다. 오목한 부분에 앉으면 의외로 편안하다. 몸을 움직이면 비로소 회전하는데, 쓰러질 듯 말 듯 하면서도 절대 쓰러지지 않는 게 신기하다.


-체험존의 ‘스펀 훌라’는 더 특별하다는데. “한국 전시를 위해 새롭게 만든 건데, 비밀이 숨겨져 있다(웃음). 일명 ‘스스로 회전하는 의자’다. 사람이 앉는 오목한 부분에 충전 배터리와 동작 체크 센서가 있어서 혼자 회전하다 사람이 다가가면 알아서 멈춘다. 의자에 앉은 후에는 온전히 사람의 힘으로 회전하게 만들었다. 결정적 아이디어는 훌라후프 축제에서 얻었다(웃음). 회전방향·속도가 의자마다 다르니 그 재미를 꼭 느껴보길 바란다.”


-수많은 아이디어를 엮어내는 회의 과정이 궁금하다. “나는 천재가 아니다. 또 아이디어란 머리에서 갑자기 ‘쓩~’하고 나오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놀랄 만한 생각은 식물처럼 정성을 들여 키워야 한다. 스튜디오 벽에는 자석을 이용한 대형 판이 걸려 있다. 아이디어부터 작업 과정까지 판에 회의 결과를 죽 붙여 놓고 그 앞에 서서 함께 대화를 나눈다. 무엇이 문제고, 무엇을 빼고 더할지. 나도 정답은 모르기 때문에 ‘이거 어때?’ ‘이건 맘에 들어?’ ‘네 생각은 어때?’ 계속 돌아가며 묻고 답한다. 머리에 뭔가 떠오르는데 그걸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 이렇게 질문·답을 하면서 말들을 수확한다. 이걸 각자 들고 가서 고민한 후 다시 모여 또 대화하고, 이걸 반복하는 게 우리의 회의 방법이다.”


-전시 제목대로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싶은 건가. “‘원래보다 조금 더 의미 있게 나은 모습’을 만들고 싶다. 특히 도시의 모습과 기능을 바꾸는 데 관심이 많다.”

6 2016년 건축한 ‘자이츠 아프리카 현대미술관’ 내부. 낙후됐지만 독특한 형태의 오래된 곡물 저장고를 활용한 케이스. 케이크 조각을 뜨듯 내부를 원형으로 베어낸 모양이 아름답다. ⓒHeatherwick Studio

7 2019년 완공을 목표로 설계중인 ‘가든 브릿지’ 3D 조감도. 템즈강을 가로지르는 보행자 전용 다리다. 헤더윅은 세상에 없던 수상정원을 꿈꾸고 있다. ⓒArup

8 치약을 마지막까지 눌러 짰을 때의 텍스처를 연상시키는 압출성형 기법의 ‘익스트루전’ 벤치. 조립 이음새가 하나도 없는 게 특징이다. ⓒPeter Mallet

9 2012년 런던 올림픽 성화대. 지면보다 높은 위치에 있던 다른 나라 성화대들과는 차별되게 204개의 성화봉을 스태디움 바닥에 누인 채 불을 붙이고, 서서히 일어서면 거대한 꽃다발 모양이 되도록 디자인 했다. ⓒEdmund Sumner

10 2004년 런던 패딩턴 유역 도시 재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제작된 ‘롤링 브릿지’. 보행자 전용 교량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멋진 조형물이기도 하다. ⓒSteve Speller

[“오래된 것에는 혼이 있다. 그 혼을 살려야 한다”]


실제로 헤더윅의 작업 중에는 공공 디자인 프로젝트가 많다. 런던 파터노스터 광장 앞에 세워진 8.4m 높이의 철제 구조물 두 개는 날개가 살짝 비틀리며 포개진 모습이다. 일반적인 디자인 조형물 같지만 전기 변전소의 냉각 통풍구다. 런던 가이스 병원 빌딩 입구에 있는 보일러실은 외관을 해치는 요소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지만 헤더윅이 모자이크식 세라믹 타일을 이용한 180개의 곡면 패널로 교체한 후 공업 디자인의 미학적인 조화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올해 말부터 공사가 시작되는 ‘가든 브릿지’도 헤더윅이 생각하는 공공 디자인의 일부다. 템즈강을 가로지르는 보행자 전용다리인데 단순한 교량 역할을 넘어 보행자들에게 울창한 수상 정원을 즐길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한다는 게 목적이다.


-가든 브릿지 계획의 시작은. “15년 전 런던의 미래를 다룬 강연에 참가했는데 배우인 조안나 럼리가 처음 제안했다. 그녀는 007영화 시리즈에서 본드 걸로 출연한 적도 있는데, 사회사업가로도 활동중이다. 당시엔 내게 능력도 시간도 없어서 덮어뒀는데, 런던 올림픽이 끝난 후 이 세계적인 도시를 위해 뭔가 해보자는 의지가 다시 생겼다. ‘왜 우리는 다리 위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지 않는 걸까’ ‘런던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멋진 장소를 만들어보자’. 운 좋게 좋은 사람들이 모여 비영리 단체를 만들 수 있었고 현재까지 시민들의 참여로 1억5600만 파운드의 기금을 마련했다. 2019년이 완공 목표다. 한국에는 템즈강보다 넓고 아름다운 한강이 있으니 이 다리 완공이 좋은 아이디어가 될 것이다.”


-공공 디자인에 관심이 많은 이유는. “난 도시를 사랑한다. 도시란 얼마나 놀라운 장소인가. 수천 명의 사람들이 조용히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할 일을 해내고 하나의 유기체로서 인간의 열망을 이뤄나가는 장소다. 하지만 이런 도시의 모습과 기능에 대해 사람들의 기대치는 낮다. 예를 들어 새 박물관은 아름답지만 암센터는 그렇지 않다. 어떤 사람에겐 박물관보다 암센터가 더 특별한 곳인데 말이다. 도시환경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이번에 한국의 승효상 건축가를 만났다고 하던데. “그 역시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설립하기보다 도시를 엮어줄 공간에 관심이 많더라. 도시의 오래된 부분을 허물지 않고 용도를 바꾸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래된 것에는 혼이 들어 있다. 모든 게 새것이면 개성도 혼도 없다. 오래된 건물의 원형을 유지하면서 변형시킨다면 진실이 담긴 공간이 될 수 있다.”


-동시에 여러 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언제 쉬나. “휴일에도 조사하고 관찰하는 걸 즐긴다. 축구 경기장을 설계할 때는 축구를, 미술관을 설계할 때는 미술을 연구하니까 별도의 취미가 필요 없다. 남들은 나를 워커홀릭(workholic)이라 부르겠지만 일이 내겐 휴식이고, 난 아직 아픈 데 없이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웃음) ●


글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사진 디뮤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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