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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아직도 성리학의 맥 형성한 향기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국토의 가을은 아름답다. 19일 하오 1시, 서울을 떠나 충주를 지나 이화령을 넘어 점촌을 거쳐 안동에 이를 때까지 줄곧 그 생각을 했다.
도서출판 한길사가 마련한 역사기행.
이번엔 안동문화권을 택했다. 안동지방은 한국사상사, 특히 퇴계 이황을 우뚝한 기둥으로 성리학의 거대한 맥을 형성한 땅. 예로부터 「조선의 추노지향」이라 일컬었다. 추노란 공· 맹이 태어난 곳. 회사원·교수·소기업가·주부·대학생등 40여명의 기행자들이 그 맥을 찾아 나섰다.
어두운 밤길, 흐르는 낙동강을 따라 5리쯤 걸어들어가 밤8시 병산 서원에 도착했다. 서애 유성룡 선생을 모신 곳. 여기서 1박키로 했다.
병산 서원 입교당의 넓은 마루.
밤10시. 삽상한 밤 기운의 세례를 받으며 강의가 시작됐다.
먼저 유한상씨 (안동문화원장)가 구수하게 「안동인 기질론」을 펴 보였다.
『콩과 보리를 제대로 구별 못하는 어수룩한 사람을 「숙맥」이라 한다. 안동은 숙맥의 고장이다. 이에 밝지 못하다. 또 안동은 생산성이 낮은 척박한 고장이다. 가난한 땅에서 숙맥스럽게 일하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었다. 자식에게 제일 먼저 굶고도 굶지 않은 체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만큼 명예를 중요시했다. 없는 사람이 명예조차 없으면 어떻게 살아가나. 그러나 권력자에겐 명예를 주지 않았다. 가난하면서도 존경할만해야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그가 「선생」이다. 「선생」이란 아무에게나 붙이는 이름이 아니다. 정말 명예스런 사람에게만 붙여주는 존칭이었다』 다음은 유초하 교수충북대 동양철학)가 「조선유학의 전개」를 강의했다.
『우리는 최근 1백년간 「근대」를 살아왔다.
의식이나 생활방식, 학문방법까지 서양적인 것이 지배하고 있다. 이제 유학, 생리학 하면 생소한 것이 돼 버렸다. 그저 무가치하고 어려운 것으로만 치부해 버린다. 그러나 1백년전만 해도 그것은 이웃끼리 친근하게 나눌 수 있는 얘기내용이었다.』
얘기는 계속됐다.
『고려 후기에 도입된 성리학은 16세기, 즉 조선 중기까지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 초 성리학은 길재의 문하생들에 의해 전파됐다. 투철한 의리정신과 집요한 실천의지로 무장했다. 중소 진주 출신 지식인(사) 계층의 이념적 무기가 됐다. 혈통이나 공훈에 줄을 대 귀족세력이 감당할 수 없는 우월한 논리로 맞섰다. 성공과 실패를 번갈아 겪었지만 네 차례의 사화가 끝날 무렵 결국 조선 중앙 정계를 장악했다.』
그러나 사정이 달라졌다.
어제의 「야」가 오늘 「여」가 되고 「공격」의 입장에서 「방어」의 자세로 바뀌었다. 자체 내의 끊임없는 권력투쟁과 자기분열 현상이 나타났다. 당쟁의 시작이다. 몰락 양반이 양산됐다. 현실 비판적인 이들과 계층상승을 노리는 중인계층의 지도적 이념으로 나타난 것이 실학이다. 이로써 성리학의 역사적 기능은 조선중기로 끝났다.
밤 2시. 유교수는 이렇게 강의를 맺었다.
『성리학이 오늘날 우리 삶에 어떤 빛을 던질지 얘기하기는 조심스럽다. 그러나 형이상학이 파기된 지금 가치를 포용하는 학문, 만물의 근원에 접근하려고 집요하게 노력했던 학문에 대한 의미를 재음미해 볼 수 있지는 않을까. 총체적 진리에 대한 집념은 인간의 구원한 바람이기도 하니까』
다음날 아침 일찍 하회 마을로 해서 안동의 하회별신굿달 놀이 관람-독립운동가 이상룡 선생 생가(임청각)-도산서원을 거쳐 서울행.
귀로의 생각은 이랬다. 이 가을, 궁핍해져 가는 철학적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서도 한번쯤 밟아 볼만한 땅이 아닐까 라고. <이근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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