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빈곤」을 개탄하는 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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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언제부터인가 우리사회에 『사람이 없다』는 개탄이 많은 것 같다.
정계에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포열해 있지만 과거에 비해 중량감이나 국민적 이미지가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고, 학계, 문화·예술계, 법조계 같은 사회의 여러 분야에 있어서도 국민적 신뢰감이 있는 중진 또는 거물이라할 만한 인물이 적다는 말이 많다.
아닌게 아니라 각분야에 있어 소위「권위 있는」인물이 적은 게 사실인 것 같다. 그렇다 보니 무슨 사회적 논란거리가 등장해도 국민들이 올바른 해답을 기다려 쳐다 볼만한 사람이별로 없다.
세간의 명리에는 초연하게 대하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세월이 갈수록 좋은 논문을 쓰면서 학문적 엄격을 쌓아 가는 대학교수라면 그는 세상의 존경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수십 년 창작활동으로 일가를 이룬 문단·예단의 노대가도 왜 거물·거목소리를 못 듣겠는가.
창의로 기업을 일으키고 청재를 쌓아 재계나 근로자의 신망을 한 몸에 받는 기업가의 한마디도 천금의 무게를 지닐 수 있다.
그렇지만 언제부터인지 우리 나라에는 이런 신뢰받는 인사, 국민적 존경을 받는 인물 층이 얇아진 게 사실인 것 같다.
고대 앞에 야당인사들이 비를 맞으며 창가를 하고 구호를 외쳤다고 해서 여야간에 시비가 분분한데 무게 있고 책임 있는 정치인이 있다면 이만한 일의 잘잘못을 가리고 문제를 수습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 없을 것이다. 지난번 학원법시비로 여야가 곧 무슨 일을 낼 것만 같았는데도 당사자들의 소리 외에는 깊은 침묵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앞으로 개헌문제를 위시해 88년까지 가는 도정을 생각하면 여론형성의 지주가 될만한 인물 층의 형성은 더욱 절실해진다.
인물빈곤의 현상은 여러 가지 각도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나쁜 정치」가 가장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아닌가 한다.
자유당이 성공적인 정치를 했던들 수많은 자유당인사들이 4 ·19후 하루아침에 배척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공화당과 유신시대의 정치가 좋았던들 당시 그 수많은 고관현직들이 지금은 연륜을 쌓은 그만큼 권위도 더 쌓게 되었을 것이다.
정치판이 고비를 넘을 때마다, 정치가 4사5입이니 3선 개헌이니 유신이니 하고 일을 저지를 때마다 거기에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이 딱지를 붙이고 상처를 입게 된 것이 지난날의 우리 정치사였다.
나쁜 정치의 당사자나 관여자를 새 정치에서 배제하는 것은 당연한 요구였던 만큼 정치변혁이 있을 때마다 늘 찾는 것이 「참신한 인물」이었지만 당시의 참신하던 사람들이 다시 정치가 한 굽이를 돌고나면 딱지만 붙이고 주저앉곤 해온 것이다. 5·16후의 참신하던 인물이나 유신시대의 새 인물들이 지금 어떻게 됐는지 생각하면 뻔한 일이다. 참신하다고 기용된 사람들 대부분이 제대로 자기 뜻을 펼쳐보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유정회로 찍히지만 않았던들 학교에서, 언론계에서 또는 그 밖의 사회각분야에서 그런 대로 더 뻗어나갈 인물들도 상당수 있었을 것이라고도 생각해본다.
이처럼 몇 차례의 정치곡절을 겪고나면 「참신한 인물」이 바닥나는 것은 정한 이치다.
실제 민정당도 4년 여전 출범할 때 인물구성에 적잖이 부심 했을 것이다. 요컨대 참신하면 저명하지 않고, 저명하면 참신하지 않은데서 고심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정치사의 역정을 거치다 보니 건국 후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도 오늘날 정계에 사람은 그득하다지만 노련미를 보이는 사람은 소수고 신인 또는 준신인이 대부분이 아닌가. 어느 정도 노련미가, 있는 사람들도 험난한 지난 세월에 부대낀 상처나 때로 인해 제대로 구실을 못하고 있지 않은가.
국회가 벌써 12대를 헤아리게 됐지만 아직도 「미숙」이니 「경험부족」이 운위되는 까닭이 이런데 있는 것이다.
「나쁜 정치」의 악영향은 정계뿐 아니다. 괜찮은 대학교수 신문기자가 더 못 크도록 만들었고, 괜찮은 관료를 주저앉히고 말았다. 유신찬양 지지의 글을 쓴 교수·문인·지식인이 그후로 고개를 못 들었으며, 이기붕씨에게 아첨을 했던 사람은 「인간만송족」으로 두고두고 매도되었다. 석학으로, 원로로 추앙 받음직 하던 분들이 특보로, 장·차관으로 등용된 나머지 공직생활에서 이렇다 할 경륜도 펴보지 못한 채 존경만 잃은 케이스도 수두룩하다.
나쁜 정치의 인재등용이 잘하면 거목이 될 재목을 분질러 서까래나 화목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오늘날 제기되는 인물빈곤론을 극복하는 길도 정치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나쁜 정치」가 아닌 「좋은 정치」로 이 시절 정치에 관여하고 담당했던 경력이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축적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돼야 할 것이다. 이 시절 정치를 찬양하거나 편들었다해서 과거 유신지지와 같은 대접을 장래에 받는 일은 없도록 돼 나가야 할 것이다.
특히 경위야 어떻든 오늘날 빚어지고 있는 인물빈곤·권위공백을 메우는 일은 시급한 과제다. 사회에 정당한 권위가 정립되지 못하면 사회성원의 지향이 이기적이 되고 대소갈등의 원만한 해결이 힘들어진다.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는 하루아침에 신뢰받는 권위들을 양산할 수는 없기 때문에 현재의 지도층이 정당하고 신뢰받는 권위를 행사하는 수밖에 없다.
88년 문제는 물론 앞으로 있을 남북대결을 위해서도 기본적인 것은 사람이며, 우리 사회의 두터운 신뢰대의 형성이다.
9월 들어 다시 인사개편설로 술렁거리는데 인재를 어떻게 키우고 관리해야 할지를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송진혁<본사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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