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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바로 보는 북한] 친중 행보 나선 김정은 ‘장성택 처형’ 앙금 걷어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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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집권 17년 동안 평양 모란봉구역에 있는 중국 대사관을 4차례 방문했습니다. 국가 최고지도자가 자국 주재 외국대사관을 찾는다는 건 외교관례상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 대통령이 서울 광화문 미국대사관에 들르는 상황을 가정해보면 답이 나옵니다. 아마 ‘부적절한 행보’란 비판과 함께 ‘친미 사대굴종’ 논란이 일겠죠.

북·중 농구 열고 이수용 파견하고
3년 만에 친선활동으로 자세 낮춰
베이징 지도부 여전히 진의 의심
중국 방문 당장은 쉽지 않을 듯

2000년 3월 5일 저녁 7시 처음으로 중국 대사관을 찾은 김정일은 만찬을 하며 자정까지 머물렀습니다. 두 달 뒤엔 베이징을 방문해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했는데요. 같은 해 6월 첫 남북 정상회담을 사전 설명하는 건 물론 한·중 수교(1992년 8월) 이후 소원했던 북·중관계를 회복하려는 전략적 선택이란 평가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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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평양의 중국대사관을 방문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류샤오밍 당시 대사 부부가 맞고 있다. [노동신문]

2007년 3월 초에는 중국의 원소절(元宵節·정월 보름)을 축하한다며 당·정·군 간부까지 이끌고 중국 대사관을 찾았죠. 김 위원장은 “조·중 두나라는 한 집안의 식구처럼 친하고, 중국 대사관에 오는 건 친척집에 다니는 것과 같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또한 2006년 10월 첫 북핵 실험 속에서도 중국이 중재한 2.13합의(북핵 시설 폐기와 대북에너지 지원, 북·미수교 등)에 감사하려는 자리였다는 분석이 제기됐죠.

그런데 후계자이자 아들인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발걸음은 달라보입니다. 집권 첫해인 2012년 12월과 이듬해 2월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와 3차 핵실험으로 중국의 체면을 구겨지게했는데요. 유엔 대북결의안에 중국이 찬성표를 던지자 그가 책임자(제1위원장)로 있는 국방위원회는 “세계의 공정한 질서를 세우는데 앞장서야 할 큰 나라들까지 제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며 직격탄을 날렸죠. 평양 고위층의 중국제품 선호현상을 겨냥해 “수입병(病)”이라며 질타하기도 했습니다. 시진핑(習近平) 체제가 출범에 맞춰 벌어진 이같은 김정은의 노골적 반중(反中) 행보에 베이징 지도부는 분노할 수 밖에 없었다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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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말 평양에서 열린 북·중 친선 농구대회를 관람하는 김정은(오른쪽 둘째) 노동당 위원장. 중국 관련 행사에 나온 건 3년 만이다. [노동신문]

이번엔 김정은의 대중(對中)셈법이 바뀌어가고 있는걸까요. 그는 최측근인 이수용 당 정무국 부위원장을 베이징에 파견해 지난 1일 시진핑 주석과 면담토록 했습니다. 7차 노동당 대회 결과를 설명하는 자리였다지만, 이를 액면그대로 믿는 시각은 드뭅니다. 김정은의 핵·미사일 도발 드라이브에 중국은 유엔결의 찬성표를 던졌고, 제재이행에도 예전보다 적극적입니다. 대북결의가 약효를 나타내면서 북한 체제의 위기감도 커지고 있다는 게 우리 당국의 분석인데요. 북한매체들이 시 주석 면담결과를 전하며 ‘핵(核)’이란 단어를 한번도 쓰지 않은 건 자세를 바짝 낮췄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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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에서는 김정은 위원장의 중국 방문 가능성도 제기하는데요. 꼬인 실타래 같은 북·중 관계를 풀지않고는 어려워보입니다. 2013년 12월 벌어진 고모부 장성택 처형이 대표적입니다. 친중 성향의 장성택을 ‘반(反)국가’ 혐의로 숙청하며 중국에 대한 석탄 헐값수출도 죄목에 올렸습니다. 대북정보 관계자는 “중국 지도층의 후견을 받는 이복형 김정남을 제거하려 2009년 6월 암살조를 파견했던 일도 여전히 북·중 간 앙금으로 남아있다”고 귀띔합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사석에선 중국을 “돼지같은 놈들”이라고 비난했지만 말과 행동은 달랐는데요. 김정은 당 위원장은 중국을 향해 도발적 언행을 그치지 않아왔죠. 그러던 그가 지난달 말 갑자기 북·중 친선농구 경기장에 나타났습니다. 2013년 7월 6.25 참전 중공군 묘지를 참배한 이후 약 3년 만에 중국 관련 친선활동에 나선 겁니다.

이런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베이징 지도부는 여전히 김정은의 진의를 의심하는 듯합니다. 비핵화 등 근본적 태도 변화 없이는 제재의 고삐도 느슨해지지 않을 기세인데요. 여전히 ‘핵보유국’과 ‘경제·핵 병진노선’ 타령을 하는 32살 최고지도자가 세상을 너무 우습게 보고 있는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yj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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