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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곡성(哭聲)’의 흥행 바라보는 국내 영화계 반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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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곡성` 스틸컷]

“미끼를 콱 물어뿐 것이고!” 영화 ‘곡성(哭聲)’(5월 11일 개봉, 나홍진 감독, 이하 ‘곡성’)이 관객을 제대로 홀렸다. 질박한 전라도 억양의 명대사는 개봉 첫 주 만에 유행어가 됐다. TV 코미디 쇼 ‘SNL 코리아’(2011~, tvN)가 이 영화를 패러디해 만든 촌극(먹성)은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개봉 4주차에 접어든 지금 ‘곡성’은 관객 560만 명(5월 30일 기준)을 넘어서며 나홍진 감독 역대 최고 흥행작으로 등극했다. 투자·제작·배급을 맡은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 이십세기폭스(이하 폭스)에게도 이 영화의 의미는 각별하다. 폭스가 한국영화에 뛰어든 지 7년 만에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첫 작품이기 때문이다.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에 초청된 것도 폭스가 투자·제작한 한국영화 중 최초다. 말하자면 ‘곡성’은 폭스가 값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얻은 첫 결실인 셈이다. 후발 주자 워너브러더스(이하 워너)가 투자·제작한 첫 한국영화 ‘밀정’(김지운 감독)도 6월 중 베일을 벗는다. 할리우드 ‘큰손’들이 시행착오를 교훈 삼아 한국영화 사업에 팔을 걷어붙인 지금, 국내 영화계의 반응은 어떨까. “‘곡성’ 한 편의 성공만으로는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다”는 전제 하에, 기대와 우려의 시선이 조심스레 엇갈렸다.

비슷비슷한 텐트폴 영화를 만드는 대기업이 더 늘었을 뿐"

폭스와 워너가 제작한 한국영화가 해외 진출 가능성이 더 높은지는 의문"

"해외 자본의 관심이 민감한 정치 이슈를 다룰 돌파구를 마련할 것이라 기대한다"

우선 한국영화 제작·배급사 관계자들은 할리우드 자본이 한국영화에 뛰어든 것을 반기는 분위기다. 국내 영화 시장은 2013년 관객 2억 명 시대를 열었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A 투자·배급사 관계자는 “폭스에 이어 워너가 한국영화에 눈길을 돌린 건 한국 내수 시장의 가능성을 크게 본 결과”라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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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밀정` 스틸컷]

다양화에 기여할 것 vs 안전만 추구할 뿐
기존 국내 투자·배급사 입장에선 한정된 시장을 놓고 경쟁자가 늘어난 상황. 마냥 웃을 수만은 없지 않을까. B 투자·배급사 관계자는 “창작자에겐 더 많은 기회가 생겼다. 장기적으로 보면 오히려 한국 영화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리라 본다”며 오히려 기대감을 내비쳤다. 그는 또 “최근 할리우드는 프리퀄·속편·리부트 버전까지 만들며 시리즈 영화로 연명하고 있다”며 “이들이 해외 현지 영화 제작에 나선 것은 다양한 IP(Intellectual Property Right·지적재산권)를 확보해 소재 고갈을 극복하려는 의도로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할리우드 파워, 한국영화의 날개 돼 줄까

이러한 현상이 궁극적으로는 ‘한국영화의 다양화에 기여할 것’이라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영화 제작사 명필름 이은 대표는 “꼭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여서가 아니라, 극장을 갖고 있지 않은 대형 투자·배급사가 두 곳 더 생겼다는 의미가 크다”면서 “폭스와 워너가 (관람 수익에만 치중하지 않고) 철저히 콘텐트 중심으로 승부한다면 주류 영화가 조금은 더 다양해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히말라야’(2015, 이석훈 감독)를 제작한 JK필름의 공동 대표이자 ‘국제시장’(2014)을 연출한 윤제균 감독 역시 “더 치열해질 배급 경쟁이 결론적으로 좋은 콘텐트를 만드는 역량을 키우게 할 것”이라 전망했다.

지난해 사회 고발적 성격이 강한 범죄 액션영화 ‘베테랑’(류승완 감독)을 제작한 외유내강 강혜정 대표는 “그간 국내 영화계에서 적극 나서서 다루기 힘든 민감한 정치 이슈가 몇몇 있었다. 오히려 해외 자본의 관심이 그런 한계를 넘어설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기대감을 밝혔다.

반면 “비슷비슷한 텐트폴 영화(Tentpole Movie·흥행 가능성이 높은 영화)를 만드는 대기업이 더 늘었을 뿐”이라는 회의적인 시각도 없지 않다. 이를테면 “‘곡성’이나 ‘밀정’ 같은 영화들은 기존 투자·배급사들도 얼마든지 탐낼 만한 프로젝트였다”는 것이다. 두 영화 모두 나홍진·김지운 같은 유명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스타 배우들이 출연한다. ‘밀정’은 소재 면에서도 안전을 추구했다. 1920년대 말 일제의 주요 시설을 파괴하려는 항일 무장 독립운동 단체 의열단과 일본 경찰 사이의 암투를 그린 시대극이라는 점에서, ‘밀정’은 지난해 관객 1270만 명을 모은 ‘암살’(최동훈 감독)을 연상케한다. 익명을 요구한 어느 제작사 대표는 “폭스와 워너가 수익을 추구하는 투자·배급사인 이상 다소 위험 부담이 있어도 냉정하게 작품만 보고 새로운 시도를 하긴 힘들 것 같다”고 했다. 한편 ‘곡성’으로 재미를 본 폭스 역시 자사의 첫 한국영화 투자작 ‘황해’(2010)부터 관계를 이어 온 나홍진 감독과 또다시 차기작을 모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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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곡성` 스틸컷]

‘곡성’의 성공만으로 가능성을 점치기는 이르다
성과가 드러난 작품이 ‘곡성’ 한 편뿐이기 때문일까. 현재로써는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들이 한국영화에 미칠 영향력은 더 두고 봐야 한다는 신중론이 강하다. 대부분의 제작사가 멀게는 내후년까지 라인업을 기존 국내 투자·배급사와 진행 중이어서, 폭스·워너와 프로젝트를 활발히 교류하기까진 물리적으로도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D 투자·배급사 관계자는 “폭스나 워너가 국내에서 투자해 성공을 거둔 한국영화를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하며 오리지널 감독에게 연출을 맡기는 방안도 고려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또 한 제작사 대표는 “한국 배우들이 최근 중국에서 인기를 끄는 만큼, 한국과 중국 시장을 동시에 노린 작품 위주로 힘을 싣게 될것”이라 내다봤다. 하지만 이 또한 가능성을 이야기한 것에 불과하다. 올해 ‘부산행’(여름 개봉 예정)으로 칸영화제에 다녀온 연상호 감독은 “칸영화제 마켓에서 ‘곡성’과 ‘밀정’의 해외 배급을 한국 해외 배급사인 화인컷이 맡고 있더라”며 “지금으로서는 폭스와 워너가 제작한 한국영화가 국내 배급사의 영화들에 비해 해외 진출 가능성이 더 높은지는 의문”이라 했다.

영화인들은 또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의 투자·제작이 자리잡으려면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할리우드 본사와의 의사소통이 어려운 탓에 의사 결정에 더 오랜 시간이 걸리고, 국내 영화계와 제작 관행이 달라 감독·배우의 개런티부터 극장 부율까지 절충해야 할 부분들이 산재해 있다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한국 영화 시장에서 번 돈을 내수 시장에 얼마나 재투자할지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메가박스(주) 플러스엠 영화투자팀 이정세 부장은 “폭스와 워너는 투자·제작한 한국영화 수익의 상당 부분을 미국에 송금하게 될 것”이라면서 “그들이 한국 영화 산업의 발전이나 창작자의 처우 개선을 위해 재투자할지 여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강혜정 대표는 “수익성이 없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직배만 하던 기존 방식으로 돌아설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고 했다. 현재 폭스와 워너는 모두 한 해에 다섯 편 안팎의 한국영화 신작을 선보이겠다고 발표한 상황. 여기에 전 세계 VOD 스트리밍 서비스 1위 업체 넷플릭스가 봉준호 감독의 신작 ‘옥자’의 투자·제작을 맡은 점 등을 감안하면 앞으로 해외 자본의 한국영화 제작·투자 경쟁은 앞으로 더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정세 부장은 “영화 제작 시스템 혁신의 차원에서 한국 영화계의 기존 판이 흔들리는 건 긍정적인 일”이라며 “이를 새로운 도약을 위한 기회로 만드는 건 한국 영화계에 달렸다. 한국 영화계 전반에 좋은 영향을 미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곡성' 둘러싼 말말말, 폭스의 입장은?
흥행 영화에 바람 잘 날 없다. 늘어나는 관객 수만큼 구설수를 낳고 있는 ‘곡성’. 폭스 한국영화 프로덕션 김호성 대표의 입장을 들어 봤다.

-'곡성’이 흥행 못하면 한국영화 사업을 접을 수도 있었다고.
“실제로 이야기가 오간 건 아니지만, 그렇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폭스가 지난 6년간 참여한 한국영화들의 상업적인 성과가 썩 좋지는 않았잖나. 하지만 해외 현지 영화 투자·제작을 전담하는 폭스 인터내셔널 프로덕션 대표가 최근 토마스 제게이어스로 바뀌고, 올해 초 내가 한국영화 프로덕션 대표로 부임하면서 내부적으로 쇄신의 분위기가 있었다. ‘곡성’이 흥행과 비평 모두 선전하면서 본사도 매우 고무된 상태다. 칸영화제에선 제게이어스 대표가 직접 와서 ‘곡성’ 팀을 격려했고, 공식 상영 때도 나홍진 감독 바로 옆자리에 앉아 관람했다.”

-‘곡성’이 향후 폭스의 한국영화 투자·제작 향방에 미친 영향이 있을까.
“지금까지 한 해에 한 편씩 선보였다면 앞으로는 1년에 네다섯 편 정도는 진행할 것 같다. 올해 하반기에 공개하려고 검토 중인 기획도 두세 편 된다.”

-국내 개봉 후엔 15세 관람가 등급에 대한 공방이 벌어졌다. 곡괭이가 사람 머리에 박히고 얼굴이 물어뜯기는 장면과 여성의 가슴 노출에 대해 일부 관객이 문제 제기를 했다.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가 ‘곡성’에만 관대했다는 의혹까지 나왔는데.
“영화 전체 분위기가 으스스하고 불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폭력 장면은 행위의 결과 위주로 묘사했을 뿐이다. 폭력의 과정을 잔인하게 드러내진 않았다. 가슴 노출도 눈에 잘 안 띄는 수준이다. 내부에선 오히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은 나홍진 감독의 전작을 좋아한 팬들이 상대적으로 관람 등급이 낮은 ‘곡성’에 지레 실망할까 우려했다. 15세 관람가 등급에 의혹이 제기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할리우드 영화 ‘레버넌트:죽음에서 돌아온 자’(1월 14일 개봉,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는 이보다 더 유혈 낭자한 전투신이 있는데, 15세 관람가 등급을 받은 것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곡성’만 문제 삼는 건 부당하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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