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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태영 수원시장의 배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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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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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재정법이라는 게 있다. 제1조에서 법 제정의 목적을 지방재정의 ‘자율성 보장’이라고 했다. 밑으로 죽 내려오면 제29조에 ‘시·군 조정교부금’이란 어려운 말이 나온다. 교부금(交付金)은 그냥 보조금(補助金)으로 번역해서 읽으면 된다. 이 돈은 기초지방자치단체인 시·군 간 ‘재정력 격차’를 조정하기 위해 광역 시·도가 거두고 중앙정부가 정한 배분방식에 따라 나눠주게 돼 있다. 예를 들어 경기도엔 31개 기초 시·군이 있는데 부자 동네에서 많이 거두고 가난한 동네에선 적게 거둬 조정교부금을 마련한다. 금수저 시(市)는 적고 흑수저 시·군은 많기에 부익부 빈익빈 혁파를 외치는 행자부의 목소리엔 명분의 힘이 있다.

그런데 ‘재정력 격차’ 해소(29조)의 명분이 지나쳐 ‘자율성 보장’(1조)을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본말의 전도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4·13 총선 열흘 뒤 박 대통령에게 보고된 행정자치부(장관 홍윤식)의 지방재정 개혁안을 받아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안이 시행되면 당장 내년부터 조정교부금이 900억원 덜 내려오고, 내후년부터는 세입에서 900억원의 결손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동안 경기도 조례로 위임했던 조정교부금의 분배방식을 중앙정부가 1년 만에 다시 회수하겠다는 것이었다. 지방재정법도 개정해 내후년엔 시·군들에 100% 수입으로 잡혔던 법인지방세를 50%만 가져갈 수 있게 했다. 현재 수원시의 가용 재원은 1000억원 정도라고 한다. 이 가운데 900억원이 날아가게 됐으니 그는 거의 패닉 상태에 빠졌다.

염 시장은 배신감도 느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인 그는 지난 1월 더민주가 지배하는 경기도 의회와 이재정 교육감이 박근혜 정부에 맞서 어린이 보육예산(누리과정)의 편성·집행을 거부할 때 “수원시엔 이 불이 번지지 않도록 해야겠다”며 별도로 긴급 예산을 준비했다. 그에겐 더민주의 당파성·선명성보다 수원시장으로서 시민의 일상을 보호하는 게 중요했다. 이 때문에 염 시장은 더민주 사람들한테 당론을 일사불란하게 따르지 않는 불편한 존재가 되었다. 경기도와 중앙정부도 당파보다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염 시장의 자세를 평가했다. 이런 충격과 배신감은 재선 시장을 하면서 처음 느낀 감정이다.

중앙정부의 지원을 끊고도 곳간에 돈이 도는 자립적 기초단체는 전국 226곳 중 경기도의 6곳뿐이다. 정부는 교부금의 수도꼭지를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220곳 기초단체를 식민지처럼 지배해 왔다. 염 시장의 수원을 포함해 성남·용인·화성·고양·과천 6곳만은 자체 수입으로 재정운용이 가능한 자율적 기초단체로 성장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그 싹이 잘리게 된 셈이다. 6개 시의 인구는 500만 명이다. 내년에 이들 시에서 ‘빼앗아’ 다른 220곳 기초단체에 나눠줄 조정교부금은 5000억원이다. 내후년에 삭감될 재원은 3000억원이다. ‘8000억원의 재정파탄’에 놀란 시장들은 지금 광화문 종합청사 앞에서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내가 참으로 궁금한 건 급진적인 재정구상을 왜 이렇게 조급하게 시행하려는가 하는 점이다. 누가 그걸 원하는가. 행자부의 정정순 지방재정세제실장은 “기초단체 간 재정 형평성을 강화하기 위해 지난 해부터 준비했던 사안이다. 정치적 배경은 없다”고 설명했다. 그렇다 해도 행자부가 명백하게 잘못한 게 있다. 이 안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이해당사자인 6개 시나 경기도에 어떤 자문을 구하지도 않았다. 충격적인 재정조치엔 최소한 시행시점의 유예기간은 줘야 하는데 그런 고려도 없었다. 절차와 시간 문제에서 행정의 낙제점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러니 대통령 임기 중에 뭔가 한 건 해치우려는 조급증이 있는 것 아니냐는 소문이 무성하다. 박근혜 정부의 눈엣가시인 이재명 성남시장을 길들이기 위해 행자부가 재정삭감의 칼을 빼들었다는 것이다. 상당히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도 길들이기설에 고개를 끄덕인다. 이 아리송한 괴담이 시중에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청와대가 해명할 상황에 몰리기 전에 안종범 정책조정수석 같은 이가 행자부 개혁안의 적절성을 한번 들여다봐야 한다.

전영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