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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영기의 시시각각

염태영 수원시장의 배신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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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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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재정법이라는 게 있다. 이 법은 1조에서 법 제정의 목적을 지방재정의 '건전하고 투명한 운용'과 '자율성의 보장'이라고 규정했다. 3조엔 지방자치단체가 '국가의 정책'에 반하는 재정운용을 해서는 안된다는 금지선이 그어져 있다. 그 밑으로 죽 내려오면 29조에 '시·군 조정교부금'이란 조금 어려운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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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금(交付金)은 그냥 보조금(補助金)으로 번역해서 읽으면 된다. 기초지방자치단체인 시·군간의 '재정력 격차'를 조정하기 위해 광역 시·도가 돈을 거두고 중앙정부가 명령하는 방식에 따라 나눠주게 돼있다. 조정교부금은 혜택을 시·군이 보지만 재원도 시·군에서 나온다. 말하자면 자기가 내고 자기가 돌려받는 식이다. 다만 낸 돈의 액수와 받는 돈의 액수가 다르기 때문에 시·군에 따라 이해관계가 예민하게 엇갈린다.

 예를 들어 경기도엔 31개 기초 시·군이 있는데 부자 동네에서 많이 거두고 가난한 동네에선 적게 거둬 조정교부금을 마련한다. 이를 배분할 땐 부자 동네에겐 적게 주고 가난한 동네한테는 많이 준다. 금수저 시(市)는 적고 흑수저 시·군은 많기에 조정교부금의 명분의 호소력은 크다.

그런데 '국가의 정책'(3조)이 명분의 호소력을 넘어서 지방재정의 '자율성의 보장'(1조)을 파괴하는 데 이르렀다. 지방재정법 3조가 1조를 파먹고 있는 것이다. 염태영(56) 수원시장의 경우를 보자. 4·13총선 열흘 뒤 박 대통령에게 보고된 행정자치부(장관 홍윤식)의 지방재정 개혁안은 염 시장에게 충격과 배신감을 안겨줬다.

충격은 이 안을 따를 경우 당장 내년부터 조정교부금이 900억원 덜 내려오고, 내후년부터는 세입에서 900억원의 결손이 발생하는 것에서 왔다. 행자부 개혁안은 시행령을 개정해 그동안 경기도 조례로 위임했던 조정교부금의 분배방식을 다시 중앙정부가 회수하겠다는 것이다. 시행한지 1년만에 원점으로 되돌리는 거꾸로 개혁이다. 개혁안의 두번 째는 지방재정법을 개정해 그동안 시·군들에게 100% 수입으로 잡혔던 법인지방세의 50%를 공동세로 전환하겠다는 것이다.

현재 수원시가 염 시장의 철학과 정책에 맞는 사업을 위해 쓸 수 있는 가용 예산은 1000억원 정도라고 한다. 이 가운데 900억원이 날라가게 됐으니 그가 숨이 막힐 지경인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내후년부터 추가로 900억의 세수 구멍이 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가용 예산은 사치스러운 얘기다. 필수 예산이 적자로 떨어지면 중앙정부의 지원금에 절대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염 시장의 배신감은 그가 야당 출신이지만 당파성에 빠지지 않고 재정을 '건전하고 투명하게 운용'해 온 준법 시장이었는데 중앙정부가 이렇게 뒤통수를 칠 수 있느냐는 느낌에서 비롯된다. 그는 지난 1월 더민주가 지배하는 경기도 의회와 이재정 교육감이 박근혜 정부에 맞서 어린이 보육예산(누리과정)의 편성·집행을 거부할 때 "수원시엔 이 불이 번지지 않게 해야겠다"며 별도로 긴급 예산을 준비했다. 그에겐 더민주의 이념성,선명성 보다 수원시장으로서 시민의 일상을 보호하는 게 중요했다.

이 때문에 염 시장은 더민주 사람들한테 당론을 일사불란하게 따르지 않는 불편한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수원시민들은 그의 선택과 용기 덕분에 다른 시·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경기도와 중앙정부도 당파 보다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염 시장의 자세를 평가했다. 여야를 선과 악이 아니라 문제해결 과정에서 접근법의 차이 정도로 이해하는 그의 사고방식은 지방CEO의 오랜 경험에서 길러졌을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문제라도 극단적인 대치상태로 끌고 가 끝내 파탄에 이르고야마는 여의도 정치 스타일과 거리가 멀다. 그런 염 시장을 순식간에 투쟁가로 변신시켰으니 행자부의 책임이 작다고 할 수 없다.

현재 중앙정부의 지원을 끊고도 곳간에 돈이 도는 자립적 기초단체는 전국 226곳 중 경기도의 6곳에 불과하다. 220곳이 자율적 재정운용이 불가능한 중앙정부의 식민지들이다. 정부는 교부금 수도꼭지를 열었다 닫았다하면서 220곳 기초단체를 지배해왔다. 염 시장의 수원을 포함해 성남(이재명 시장·더민주)·용인(정찬민·새누리당)·화성(채인석·더민주)·고양(최성·더민주)·과천(신계용·새누리) 6곳만은 자체 수입으로 재정운용이 가능한 자율적 기초단체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행자부가 그 꼴을 못보겠다고 차단해 버린 셈이다.

6명의 시장들에게 행자부 안은 개혁이 아니라 개악이다. 내년에 이들 6개시에서 '빼앗아' 다른 220곳 기초단체에 나눠줄 조정교부금은 5000억원이다. 내후년 법인지방세의 공동세 전환으로 삭감될 재원은 3000억원이다. '8000억원의 재정파탄'에 놀란 6개시 시장들은 지금 광화문 종합청사 앞에서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다음 주엔 수만명 규모의 연합시민 집회를 계획하고 있다.

내가 참으로 궁금한 건 이런 급진적인 개혁 혹은 개악안을 왜 이렇게 조급하게 시행하려는가,하는 점이다. 행자부의 정정순 지방재정세제실장은 "기초단체간 재정 형평성을 강화하기 위해 지난 해부터 단계별로 준비했던 사안이다. 정치적 배경은 없다"고 설명했다. 그렇다해도 행자부가 명백하게 잘못한 건 있다. 이 시행안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이해당사자인 6개 시나 경기도에 어떤 자문도 구하지 않았다.

충격적인 재정조치엔 최소한 시행시점의 유예기간은 줘야 하는데 그런 고려도 전혀 없었다. 절차와 시간 문제에서 행정의 낙제점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러니 대통령 임기 중에 뭔가 한 건 해치우려는 조급증이 어디에선가 작동한 게 아니냐는 소문이 무성하다. 이재명 성남시장이 독립운동이라도 하는듯이 박 대통령과 중앙정부를 정면으로 공격하고 청년배당금 지급 등 3대 무상복지를 강행하고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소송을 내놓자 '이재명 길들이기' 용도로 행자부가 재정삭감의 칼을 빼들었다는 것이다. 상당히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도 이재명 길들이기설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사실인지 허위인지 아리송한 이 괴담이 시중에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청와대가 해명할 상황으로 몰리기 전에 안종범 정책조정수석같은 이가 행자부 개혁안을 한번 더 들여다봐야 한다.

전영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