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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잘못이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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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현
박재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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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의 죽음 앞에 오열하는 부모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큼 참담한 일은 없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가 그랬고,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그랬다. 서울 강남역에서 있었던 ‘묻지마 살인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열아홉 살의 청년은 미처 뜯지 못한 사발면을 이승에 남기고 유명을 달리했다. 공구통 속에 덩그러니 놓여진 사발면과 숟가락을 통해 그와 가족들의 비극을 더듬어가야 하는 것은 어쩌면 살아남은 자의 숙명일지도 모를 일이다. 스무 살조차도 채울 수 없었던 청년에게 먹고사는 것은 지탱하기 힘든 삶의 무게였고, 우리는 그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한 것이다.

지난 주말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고치다 열차에 치여 숨진 김모씨의 시신이 안치된 건국대병원 장례식장. 사고 발생 5일 만인 2일 장례절차가 시작됐다. 시민과 정치인들의 조문을 받는 김씨 부모는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하다”고 거듭 말했다. 김씨 어머니는 “아이가 죽은 날, 나도 이미 죽었다”고 했다. 삶이 허무하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던 기성세대들조차도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서러운 눈물까지는 삼킬 수 없는 듯했다. 삶을 채 살아보기도 전에 꺾여버린 한 젊은이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할까.

김씨 어머니 주장과 경찰 수사, 언론 취재 등을 토대로 사고 현장으로 들어가보자.

공고를 졸업한 김씨는 7개월 전 서울메트로 하청업체에 입사했다. 간단한 교육을 받고 지하철 1~4호선의 승강장 안전문 수리를 맡았다. 매뉴얼은 ‘2인1조’로 작업하도록 했지만 인력이 부족해 혼자 출동하는 일이 잦았다. 사고 당일 저녁 근무조는 김씨를 포함해 6명이었다. 4명은 현장에 나갔고, 그는 다른 한 명과 함께 사무실에 있었다. “구의역 승강장 안전문이 고장났다”는 신고를 받고 그는 서둘러 현장으로 혼자 나갔다. “신고 접수 후 1시간 내에 출동을 완료하지 못하면 지연배상금을 청구한다”는 계약에 따른 것이었다. 50분 만에 구의역에 도착한 그는 스크린도어를 따고 들어갔다가 열차와 마주했다.

사고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온 김씨 어머니는 얼굴이 퉁퉁 부어 있고 뒷머리는 날아가고 없는 시신을 봐야 했다. “뒤통수만 봐도 우리 아들임을 알 수 있는데, 20년간 키워온 어미가 아들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어느 부모가 그런 처참한 모습을 보고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의 절규는 계속됐다. “절대 우리 아이가 아니라고, 절대 우리 아이가 아니라고 믿고 싶었는데 짙은 눈썹과 벗어놓은 옷가지를 보니 아이가 입고 나간 것이 맞았습니다. 저의 남은 인생은 숨을 쉬고 있지만 제가 살아가고 있는 삶이 아닙니다.”

사고 직후 서울메트로 관계자는 김씨 어머니에게 “보고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작업을 한 아이의 과실”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작업일지에는 ‘2인1조’로 작업을 한 것처럼 서류를 꾸며놓았다.

왜 김씨는 혼자서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기득권층의 구조적 비리가 숨어 있다. ‘퇴직자 38명을 월급 422만원에 정규직으로 고용하라’는 서울메트로의 요구를 김씨가 소속된 회사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원청에서 하청으로, 하청에서 용역으로,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내려가면서 갑질이 이뤄진 것이다. 먹이사슬 구조의 가장 밑부분에 있었던 김씨는 포식자를 위한 희생양에 불과했다.

이러고도 청년들에게 “아프니깐 청춘”이라고 말할 수 있나.

2일 구의역 사고 현장엔 김씨를 위한 햇반과 음료수, 조화 등이 놓여 있었다. 여러 가지 색깔의 접착식 메모지엔 김씨를 추모하는 젊은 세대들의 글이 빼곡했다.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고 사는 세상’에 대한 원망과 함께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아우성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무능하고 무책임하며 무신경했던 아비들은 할 말이 없다”는 메모를 보며 현장을 떠나는 나의 뒷덜미가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날도 지하철은 젊은 죽음을 뒤로한 채 반복적으로 오가고 있었다. 시민들의 얘기는 이미 소음 속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박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