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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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죽음에는 다섯단계가 있다. 수백명의 환자 임종을 지켜본 미국 시카고대 정신의학자 「엘리자베드·K·로스」박사는『죽음과 임종에 관해서』라는 유명한 저서를 남겼다. 1969년 출간.
「로스」박사는 이 저서에서 말기환자의 반응을 다섯가지로 추적했다.
첫 단계는 부인.『틀려요. 나는 아녜요. 정말 그렇지 않을 거예요』누구나 자신의 죽음 예고는 이렇게 받아들인다. 이 과정이 지나면 반 혼수상태에서 자폐에 빠진다. 옆에 누가 있는 것이 싫어지는 상태다.
둘째 단계는 분노. 왜 내가 죽어야 하는가, 초자연에 대한 분노다.
세째 단계는 타협. 신앙을 가진 사람은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초자연의 힘에 의지하려고 한다. 애원하고, 기도하는 자세다.
네째 단계는 우울. 여기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반응적 우울로 이 세상과의 결별을 생각하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준비적 우울이다. 죽음에 대비하는 자세다.
마지막 다섯번째 단계는 수용. 처절한 투쟁은 끝나고, 오랜 여행에서 돌아와 편히 쉬고 싶은 심정과 같다. 안심입명의 경지다.
「로스」박사의 5단계 임종설은 그나마 여유가 있다. 죽음은 충격적이고, 받아들일수 없는 일이지만 태풍이 지나간 뒤의 고요 속에서 맞아들일 경지에 이를수도 있다. 유서는 이런 경우에 쓴다.
그러나 죽음이 8천수백m 상공에서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순간적으로 닥치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정신과의사가 동승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밖에 없다.
바로 엊그제 일본에서 추락한. 보잉747 JAL기속에서 죽음 5분을 앞두고 실로 기가막힌 일이 벌어졌다.
어느 52세의 아버지는 아들과 두딸에게 유언장을 썼다. 40세 아버지의 피묻은 유서도 있었다.
우선 그 절망의 순간에 펜을 꺼내 글을 쓰는 사람의 심정은 감동을 넘어 전율스럽기 까지 하다.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한번은 해볼 것이다.
52세 아버지는「내 아이들에게」먼저 유언을 하고,「불쌍한 네 엄마」를 생각했다.『열심히 공부해라』는 말은 순간 미소를 짓게도 하지만, 아이들의 미래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40세 가장도 부인에게「애들을 부탁」했다.
『역시 사람은』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내일을 생각하는 삶은 사람의 본능 같기도 하다. 우리는 어이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내면에서 눈물겨운 희망의 메시지를 읽는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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