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24)제83화 장경근 일기|득표수를 줄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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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60년3윌15일>
…투표를 끝내고 지프로 내 선거구인 부천군 투표소를 돌아봤다. 완장부대도 없고 참관인축출도 없는 평온한 선거였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오 6시반쯤 중앙당 기획위원회에돌아와 개표소식을 기다렸다. 9시 좀 지나 급보가 왔다.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대가 파출소를 부쉈다는 것. 부산에서 도경 경찰대가 급파되어 진압중이라는 중간보고였다.
끝내 일은 저질러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기획위원들도 같은 생각인 듯 침통한 얼굴들이었다. 최내무가 저지른 무리에 이상 더 국민이 반발하지 않기를 빌 뿐 당장은 우리로선방도가 없었다. 선거구를 돌아보느라 과로한 탓인지 당뇨병으로 자주 발작되는 편도선염과고열로 견딜 수 없었다. 약을 먹어야겠기에 집에 돌아왔다. 잠시 숴다 나갈 생각이었는데 신열과 피로로 일어날 수 없어 그대로 잠들었다.

<60년3윌16일>
새벽5시반쯤 부천군청 개표소에 나가 있던 정덕균비서가 전화를 걸어왔다. 경기도지사로부터 자유당 정-부통령 후보의 득표가 너무 많으나 삭감해 발표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는연락이었다. 부산에서도 부정이 있었다는 말인가. 내 눈으로 확인했는데…. 나는 정비서에게 말했다. 부천군에선 선거부정은 없었다. 도지사가 그런 명령을 내릴 권한이 있는가. 안 된다.선거위원·군수, 기타 관계관에게 내 뜻을 전해 득표수를 줄이는 따위는 하지 말도록 하라고 일렀다. 나는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그런데 기획위원회 비서실에서 나오라는 연락이 왔다. 곧장 기획위원회로 나갔더니 한희석위원장 등 몇 사람이 나와 있었고 이재학위원은 소파에서 잠을 잔 듯 그제서야 부스스 일어나고 있었다. 라디오는 이미 자유당 후보가 당선권을 넘어섰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내가 득표기록을 살피려는데 누군가가 그럴 것 없다고 했다. 곧 보고가 있었다. 어제 저녁개표 중간보고를 검토한 끝에 기획위원회를 열어 전국적으로 자유당 후보의 득표가 많으니 이를 적절히 줄여 발표하도록 정부에 요청키로 결의했다. 결의내용은 즉시 최내무에게 통보돼 최내무 지시로 현재 모든 선거구에서 적절히 조정해 발표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득표수삭감발표를 기획위원회가 결의하다니…. 정말이지 상식 밖의 일이었다. 『아니, 결의를 하다니…』라는 내 말에 한 위원이 『우리 당 후보의 표가 너무 많아 부자연스러웠기 때문에…』라고 뒷말을 흐렸다. 새벽 정비서의 전화연락하며…. 결국 최내무의 부정선거 지령은전국에서 감행되었고 득표와 삭감 발표도 전국적으로 지령해 행하고 있음을 비로소 알았다.
부천도 내가 본 것과는 달리 부정이 저질러졌겠구나, 그런 생각도 났다. 암담한 심경이었다. 그런데 문득 내기건 생각이 났다. 기획위원들은 자유당 후보의 예상득표수를 써 정기섭위원에게 맡기고 개표 완료 후 이를 개봉해 실득표에 근접한 순위로 상을 주기로 했었는데,최내무의 조작으로 내기가 무효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났고 이런 판에 그런 생각을 떠올린것 때문에 쓴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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