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로 총선 이긴 캐머런···"EU 잔류" 국민설득 통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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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칠의 역사=제2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46년.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스위스 취리히대에서 유럽 통합의 첫발을 여는 역사적인 연설을 남긴다. “유럽 대륙이 평화·안전·자유 속에서 살 수 있도록 우리는 유럽 합중국을 건설해야 한다.”

[똑똑한 금요일] 영국 ‘EU 탈퇴’ 찬반 투표 D-27

# 대처의 역사=“유럽연합(EU)이란 초국가를 만드는 것은 현대 시대에 가장 어리석은 행동이다. EU는 결국 눈물을 흘리며 파국을 맞을 것이다.” ‘철의 여인’으로 불리며 ‘영국병’을 치유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80년대에 EU의 운명을 이렇게 예상했다.

윈스턴 처칠이냐 마거릿 대처냐. 다음달 23일(이하 현지시간) 영국의 EU 탈퇴(브렉시트·Brexit) 국민투표를 앞둔 영국호의 뱃머리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다.

| ‘처칠의 길’ 따르는 잔류파
“탈퇴 땐 2년간 일자리 82만개 줄어”
캐머런 ‘경제적 재앙’ 강조에도
여론조사 찬반 팽팽, 벼랑 끝 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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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대표적인 도박사이트인 베팅페어와 래드브룩스는 잔류 우세를 각각 78%와 81%로 예상했다. 하지만 여론은 팽팽하게 맞선다. 지난 22일 여론조사기관 ICM의 설문조사에서는 잔류와 탈퇴가 45대 45였다. 팽팽하다. 이런 분위기가 이어지면 결국 투표율이 승부를 가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EU의 뿌리는 50년 독일과 프랑스가 맺은 유럽 석탄·철강공동체(ECSC)다. 이후 이탈리아·벨기에·네덜란드 등이 이 공동체에 참여했다. 공동체는 유럽경제공동체(EEC)→유럽공동체(EC) 등으로 발전했다. 영국은 73년 EC에 가입했다. EC는 91년 EU가 되면서 명실상부한 유럽공동체가 됐다. EU는 유럽 내 단일시장을 구축했다. 유럽시민권제도를 도입해 회원국 국민의 권리와 이익보호를 강화했다. 미국과 맞서는 유럽 합중국의 위용을 갖췄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 이후 EU는 분열됐다. 영국은 특히 반(反)EU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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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잔류를 주장하는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브렉시트 국민투표는 캐머런의 자승자박이다. 지난해 5월 총선 당시 반EU 정서가 고조되자 EU 내 영국의 지위 변화를 위한 협상을 추진하며 국민투표 실시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영국은 EU 회원국이라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위기에 따라 금융 지원을 해야 했다. 파운드화를 쓰는 영국 국민의 불만이 싹튼 이유다. 더욱이 EU 안에서는 장벽이 없어 이민자를 받아들여야 하고 복지 혜택도 줘야 한다. 경제가 나빠지고 일자리가 주는 영국 현실에서 이 또한 불만 요소가 됐다.

브렉시트 등을 앞세운 캐머런의 보수당은 23년 만에 처음으로 단독 과반을 확보하며 압승했다. 당시 워싱턴포스트(WP)는 “캐머런의 정치적 카리스마와 교활함이 승리로 이끌었다”라고 전했다.

총선 승리 이후 캐머런 총리는 “브렉시트가 발생하면 EU도 타격을 입는다”는 ‘협박’을 앞세워 EU와 협상에 성공했다. 개혁안은 영국에만 특별 지위를 보장했다. 이제 영국은 이민자에 대한 복지 혜택을 축소할 수 있다. EU 의회가 제정한 법률을 거부할 권한도 가진다. 유로존의 결정이 영국 금융산업 등에 피해를 줄 때 긴급제한 조치를 요구할 수도 있다.

캐머런은 이런 합의안을 바탕으로 ‘EU 잔류’를 선언했다. 공약대로 국민투표를 피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유럽 내 더 강한 영국(Britain Stronger in Europe)’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브렉시트를 막기 위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 총대는 조지 오즈번 재무장관이 멨다. 오즈번 장관은 23일 “브렉시트를 택하는 것은 ‘DIY(Do it yourself·직접 만든) 침체’에 빠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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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재무부는 브렉시트의 단기적 영향을 분석한 보고서에서 “영국이 EU를 탈퇴하면 향후 2년간 국내총생산(GDP)이 3.6% 줄고, 52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밝혔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면 GDP가 6% 줄고, 82만 개의 일자리가 없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평균 실질 임금은 2.8% 줄고, 파운드화 가치는 12%나 떨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오즈번은 21일 BBC와의 인터뷰에서 “EU에서 탈퇴하면 집값이 18%가량 폭락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잔류파는 ‘경제적 재앙’을 앞세워 파상공세를 펴고 있지만 효과는 생각보다 신통찮다. 브렉시트 지지가 만만찮은 힘을 얻는 밑바탕에는 대륙과의 통합에 회의적인 국민 정서에다 영국민이 겪는 경제적 고통이 깔려 있다. EU 탈퇴파는 이민자를 겨냥하고 있다. 지난해에만 EU 출신 취업자는 25만 명이 늘어나며 사상 최대인 220만 명이 됐다. 이들에게 주택과 교육, 보건서비스 혜택이 돌아가며 영국인의 불만이 고조됐다. ‘탈퇴에 투표를(Vote Leave)’ 캠페인을 이끄는 매슈 엘리엇은 “집값이 오르는 것은 이민자가 늘어나 집이 모자라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런던 주택 가격은 지난 4년 동안 45%나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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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처의 길’ 따르는 탈퇴파
“22조원 EU분담금, 영국 위해 써야”
이민자 몰려 일자리 뺏는 데 불만
장관 6명도 캐머런에 등돌려

탈퇴파는 브렉시트를 통해 영국이 EU에 매년 내는 예산 분담금을 영국 내 복지와 경제 성장을 위해 쓸 수 있다고 주장한다.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지난해 영국은 책정된 분담금 중 129억 파운드(약 22조4000억원)를 냈다. 이 중 EU가 공적자금 지원 명목 등으로 영국에 돌려준 돈은 약 60억 파운드다. 여기에 해외 공적 원조(10억 파운드)를 제외하면 영국은 65억 파운드가량을 EU 회원국 지위를 유지하는 데 쓰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보수당의 분열이 캐머런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보수당은 EU 잔류파와 탈퇴파로 나뉘며 내전을 치르고 있다. 내각에서 장관 6명이 캐머런에게 등을 돌리고 탈퇴파에 합류했다. 탈퇴파의 선봉에는 보리스 존슨 전 런던시장이 서 있다. 인디펜던트는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을 상징하는 두 사람이 브렉시트를 앞두고 정치생명을 건 한판 승부를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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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은 것은 치열한 손익 계산이다. 영국이 EU 탈퇴로 줄일 수 있는 비용은 연간 100억 파운드 정도의 분담금이다. 반면 탈퇴 과정에서 직면할 손실은 막대할 것으로 예상된다. 리스본조약에 따르면 탈퇴를 원하는 국가는 향후 2년간 회원국과 탈퇴 조건 협상을 마쳐야 한다. 협상에 실패하면 그동안 EU 국가와 맺은 모든 협약의 효력이 중단된다. 수출의 44%를 차지하는 최대 교역국인 EU는 물론 EU와 무역협정을 체결한 53개국과 무역협정을 새로 맺어야 한다. 5억 인구의 단일시장인 EU 시장에 대한 접근 비용도 고민해야 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EU를 떠난 영국이 미국과 협상하려면 앞으로 줄 뒤쪽에 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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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자금 이탈과 그에 따른 경제 전반의 충격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마크 카니 영국은행 총재는 “영국의 경상수지 적자를 메워온 것은 ‘이방인의 호의’인 외국인직접투자(FDI) 자금”이라며 “자본 유출에 따른 파운드화 급락과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27일 뒤 영국은 운명의 주사위를 던진다. 이미 한 번의 경험이 있다. 75년 노동당 정부 시절 EU의 전신인 EC의 잔류를 놓고 찬반 투표를 벌였다. 당시에는 67%가 잔류를 택하며 처칠의 후예 쪽을 택했다. 41년이 지난 지금, 국가의 운명을 건 ‘세기의 도박’에서 또다시 처칠 쪽에 설 것인가. 아니면 대처를 택할 것인가.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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