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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성적 감춘다고 학교 격차 사라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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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서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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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서
사회부문 기자

교육부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매년 전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성적 분석 결과를 발표하고 수능 성적 원자료를 국회와 연구자들에게 공개한다. 모든 수험생의 영역별 점수·등급 등이 담긴 이 자료를 분석하면 학교와 지역별 성적 현황을 정밀하게 살펴볼 수 있다.

그런데 지난 25일 교육부가 국회에 제출한 성적 자료에는 지난해까지와 달리 지역과 학교명 등이 삭제돼 있었다. 지역별·학교별 분석이 사실상 원천 차단된 것이다. 교육부는 “학교별로 서열화된 성적을 그대로 공개하면 고교 격차만 확대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본지를 비롯한 몇몇 언론사는 응시자 수 등 제한된 정보를 가지고 상위권 일부 학교명만 확인한 뒤 기사화해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자료를 감춘다고 엄연히 존재하는 지역별·학교별 성적 격차가 과연 사라질까. 오히려 학부모의 알권리만 차단되고 일부 사교육 업체의 신뢰하기 어려운 정보만 진짜 정보로 둔갑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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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기자]

학교별 성적 공개가 서열을 고착화할 것이란 교육부의 우려 또한 동의하기 힘들다. 성적이 공개된 가운데서도 학교 서열은 계속 변해 왔기 때문이다. 불과 4~5년 전만 해도 최상위권을 휩쓸던 외국어고는 최근 순위가 하락하고 자사고가 강세를 보이는 게 대표적이다. 각 지역의 ‘명문고’가 바뀌는 모습도 서열 고착화와는 거리가 멀다. 학부모들은 기존의 학교 서열만 보지 않는다. 대입 제도와 취업 환경의 변화, 학교별 교육 과정 등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

수능은 국가적으로 대입을 위한 시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60만 명이 한날한시에 치르는 유일한 시험인 만큼 지역별·학교별 학력 수준을 진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교육부가 매년 발표하는 수능 분석 결과에는 남녀 간 성적 비교 등 단편 정보만 담겨 있을 뿐이다. 성적 격차에 대한 원인과 대책을 심도 있게 분석한 자료는 찾아볼 수가 없다.

1994학년도부터 23년간 수능 성적은 ‘판도라의 상자’처럼 열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간주됐다. 도농 간, 특목고와 일반고 간 성적 격차가 갈수록 벌어졌지만 정부는 자료 공개를 막는 데만 급급했다. 2011년 대법원은 교육부에 수능 정보를 공개하라고 판결하면서 “학교 간 서열화, 학부모 경쟁 심리 자극 등의 문제점이 있을 수 있지만 이를 공개해 교육 현실에 대한 생산적 토론을 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고 했다. 학교 간 격차가 크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감히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곪은 부위를 드러낸 뒤 교사·학부모·학생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해법을 모색하는 게 교육부가 진짜 해야 할 일이다.

남윤서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