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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총선과 87년 체제의 재편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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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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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호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부

현재의 한국 정치를 ‘87년 체제’라고 부르는 이유는 현행 헌법 개정 시점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정치공동체가 1987년에 폭발한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으로 탄생했으며 그 이전 유신과 5공 권위주의 정권과는 질적으로 다른 정체(政體)라는 것을 의미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동시에 ‘87년 체제’라는 이름은 그것이 30년 동안 지속되면서 누적된 모순과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말이 되었다. 우리의 정치·경제·사회·문화가 성장하고 변화한 만큼 때로는 그것을 품고 있는 외피가 거추장스러울 때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각종 지면이나 토론회에서 심심찮게 개헌 이야기가 불거져 나오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선거와 정당정치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87년 체제’는 지역주의에 기반한 정당의 할거, 양당의 정치 과점(寡占), 그리고 인물이 지배하는 정치 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인위적인 제도 개혁에 앞서 이미 상당한 균열이 감지되고 있었으며 그것이 지난 총선에서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한국 정당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은 아마도 지난 총선에서 국민의당이 받은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636만 표의 정당 비례대표 선거 득표가 어디서 왔는가 하는 질문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지역을 가로질러 골고루 얻은 27%의 정당 득표력은 대통령 선거의 맥락에서 그 의미가 작지 않으며, 언제든 기존 양당을 버릴 준비가 된 유권자 집단의 크기를 가늠하게 해 준다.

서울대 정치커뮤니케이션 센터가 이번 총선 기간 수집한 자료에 의하면 이들에게 특정한 여-야, 진보-보수 편향이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에게 투표한 약 30%가, 그리고 문재인 후보에게 투표한 약 27%가 이번 국민의당 정당 비례대표 선거에 투표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또 새누리당 지역구 후보를 찍은 사람의 약 24%가, 더불어민주당 지역구 후보를 선택한 유권자의 약 22%가 정당 선택에서는 국민의당으로 분할 투표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요컨대 국민의당은 기존 여야 정당들의 표밭을 동시에 잠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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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하나의 집단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다만, 이들이 왜 기존의 여야 정당들로부터 이탈했는지는 매우 흥미로운 질문이 아닐 수 없으며 우리 정치의 향후 30년을 좌우하는 비밀이 여기에 숨어 있을지 모른다.

기존 새누리당 지지자들이 국민의당으로, 적어도 비례투표에서 이탈한 이유는 새누리당이 주장하는 ‘보수’가 변질했다는 인식과 궤를 같이한다. 3당 합당이 유신-5공 세력이 민주화 세력인 통일민주당을 끌어들인 사건이었던 것처럼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서 압승할 수 있었던 것은 시장 자유화 등의 반권위주의적 의제를 보수가 선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선거에서 새누리당 ‘이탈자’와 ‘잔류자’들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 교과서 국정화 이슈였다는 결과를 비춰 본다면, 결국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국가주의적 보수의 브랜드를 이들이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었고 국민의당이라는 대안적 선택을 한 것이 아닌가 해석할 수 있다.

더 흥미로운 부분은 더민주를 이탈해 국민의당을 비례대표 정당으로 선택한 이들의 특징이다. 여러 정책들 중 더민주 지지자와 이탈자들을 가장 극적으로 갈라놓은 이슈는 복지 예산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의당 지지자들은 복지 지출을 반대하는 정도가 더민주 지지자들보다는 새누리당 지지자들과 매우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이 양자의 조합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들을 하나로 포괄하는 이름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을 전통적인 자유주의, 혹은 자유지상주의라 부를 수 있을 것이며, 권위주의 국가이건 복지주의 국가이건 어떤 형태의 국가적 개입으로부터도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한국 정치 지형에서의 전통적 보수도 전통적 진보도 아닌 제3의 길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정당사를 연구하는 이들에 의하면 한 세대가 지나가는 30년이라는 시간은 유권자와 정당이 맺어져 있는 하나의 ‘체제’가 만들어지고 붕괴하는, 즉 재편성되는 사이클이기도 하다. 30년대의 뉴딜연합과, 60년대의 미국의 시민권 운동, 그리고 90년대의 공화당 양원 석권 등을 본다면 30년의 시간에 매우 근본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87년 체제’가 성립되고 30년이 지난 지금, 어쩌면 우리는 이러한 정당정치 재편성의 시작을 목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새로운 경향이 완전히 정당정치의 틀을 바꿀 것인지는 기존 정당들과 국민의당이 어떻게 시민들에게 비전과 전망을 제시하면서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박원호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