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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물러가라” 봉변당한 안철수…봉하엔 공허한 “통합” 외침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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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에요, 우리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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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7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왼쪽)가 노 전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와 함께 추도식장으로 가고 있다. 가운데는 안희정충남도지사. [김해=송봉근 기자]

23일 오후 1시30분쯤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7주기 추도식이 열린 곳에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나타났다. 노무현재단 이사인 문 전 대표를 보더니 한 중년 여성이 달려와 와락 껴안았다. ‘오빠’를 외치는 지지자를 문 전 대표는 환한 웃음으로 대했다. 문 전 대표가 걸어가는 길목마다 악수를 청하는 이들이 밀려들었다. 추도식에 참석한 심상정 대표 등 정의당 관계자들에게도 행인들은 “심상정”을 외치며 반겼다.

“안철수 환영, 친노 일동” 현수막 걸렸지만
물세례 우려 경찰 우산 호위 받으며 이동
권양숙 여사 만난 뒤엔 뒷문으로 빠져나가
문재인·김종인은 서로 인사조차 안 나눠

하지만 국민의당 인사들에 대한 대접은 달랐다. 안철수 국민의당 공동대표와 천정배 공동대표, 박지원 원내대표 등은 버스에서 내린 뒤 사복 경찰과 당직자들의 보호를 받고야 행사장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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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국민의당 공동대표가 추도식을 마친 뒤 경찰의 경호를 받으며 이동하고 있다. 안 대표는 이날 일부 친노 지지자로부터 욕설이 섞인 고성을 들었다. [김해=송봉근 기자]

‘친노’ 지지자로 보이는 이들은 “철수야 니는 올 자격이 없다” “전라도로 가라 XX야” “이명박 앞잡이 안철수가 여기 왜 왔나” 같은 욕설과 비난을 쏟아냈다. 노무현재단 관계자들이 “욕하지 말라”고 만류했지만 ‘지역주의 선동하는 안철수 물러가라’는 종이 피켓도 보였다.

추도식에 이어 오후 3시쯤 묘소에서 분향을 마친 참석자들이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를 예방하기 위해 사저로 이동할 때도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졌다. 물세례를 받을까 우려한 경찰들이 안 대표를 우산으로 감싼 상태에서 인파 속을 지났다. 안 대표를 향해선 “대권 욕심에 눈멀지 말고 인간이 돼라”고 소리 지르는 이들이 있었다.

반면 문 전 대표가 같은 길을 지날 때에는 “문재인 만세” 연호가 터졌다. 안희정 충남도지사와 노무현재단 이사장인 이해찬 의원, 더민주 표창원 당선자 등도 환호성에 휩싸였다. 결국 행사를 마친 안 대표는 사저 뒷문을 통해 빠져나가야 했다.

봉하마을에는 이날 한국 야권의 주요 인사가 총집결했다. 하지만 민감한 관계인 주요 인사 간의 접촉은 활발하지 않았다.

총선 후 만찬을 함께했다가 진실 공방에 휩싸였던 김종인 더민주 비상대책위 대표와 문 전 대표는 자리가 서로 떨어져 있긴 했지만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 유가족과 나란히 서서 사람들을 맞은 이해찬 의원은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와는 웃으며 악수를 나눴지만 안 대표와는 목례만 했다. 친노 진영 소속으로 최근 대선 경쟁자냐 협력자냐의 논란을 빚은 문 전 대표와 안 충남도지사가 권 여사의 사저에서 반갑게 인사를 나눈 게 그나마 눈길을 끌 정도였다.

이날 추도식 무대에는 노 전 대통령이 강조한 ‘깨어있는 시민’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강조한 ‘행동하는 양심’이란 글귀가 나란히 내걸렸다.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스승’으로 불린 김원기 전 국회의장은 추도사에서 “우리는 김 전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을 하나로 이해해야 한다”며 “두 대통령을 잇겠다면서도 서로 갈등하고 있는 지금, 우리가 가야 할 길은 통합”이라고 소리쳤다.

이날 봉하마을 주차장엔 ‘안철수 대표의 봉하 방문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친노 일동’이란 현수막도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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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으로 감싼 상태에서 인파를 빠져나가던 안 대표의 앞에 서서 길을 안내한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 김경수 당선자는 “추도식에 오는 정치인들 중 생각이 다르고 언행에 불만이 있었다고 해서 예의를 갖추지 않는 것은 ‘노무현 정신’에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김 당선자는 “노 전 대통령은 ‘대화와 타협, 관용과 통합이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라고 늘 강조했다”고 소개했다. 문 전 대표도 “친노라는 말로 더 이상 노 전 대통령을 갈등의 현실 정치에 끌어들이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5월이 한국 정치에 주는 의미는 크다.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열리는 광주가 있고, 노 전 대통령의 추도식이 열리는 봉하마을이 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5월인데 내년 5월엔 문 전 대표에게 그랬던 것처럼 안철수 대표, 나아가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광주와 봉하가 넉넉할 순 없을까.

김해=이지상·박가영 기자 ground@joongang.co.kr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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