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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사학은 돕지못하면 가만둬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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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1960년대부터 세계 여러나라들은 제각기 고등교육으로 말미암은 고민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것은 크게 두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급속도로 발달한 현대문명사회에서의 산업과 국가간의 경제경쟁이 선진국들의 고등교육에다 변화를 요구하게 된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과거의 소수정예주의를 지향하던 고등교육정책이 양적확장에의 요구라는 도전을 받게 되었고 미국서는 민주적 대중교육을 자랑하던 고등교육정책이 질적저하라는 도전을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유럽의 나라들에서는 대학생수가 급작스레 불어나기 시작했고 미국서는 국가적으로 중요시되는 분야가 강한 1류대학들에 연구비지원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우수경쟁에 관련되는 분야의 학문들에서는 연구비지원이 갑작스럽게 불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모든 대학에 골고루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일부 명문대학들로만 집중되었다.
고도산업시대로 접어든 결과 나타나게된 고등교육정책의 변화는 서구에서나 미국에서나 상당한 혼란과 시행착오를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인력수급의 전망과 계획에 맞추어 대학교육의 내용과 방향, 규모 등을 조정해 보려했던 60년대의 교육정책은 서구에서나 미국에서나 비록 형태와 원인은 달랐을지라도 결과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었다.

<경쟁이 변화를 요구|질저하 도전에 직면>
서구의 경우 일껏 돈들여 길러놓은 고급 전문 인력이 다른나라에 유출되어버리는 두뇌유출 현상이 한동안 계속되었는가 하면 미국서는 국제정치가 동서화해분위기와 우주계획의 축소로 우주경쟁에 이기려고 열심히 길러낸 고급전문인력들이 쓸모가 없게 되었다.
고등교육정책에서 특히 인력양성계획은 이렇게 관련되는 변인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상당한 정도로 융통성을 두지 않는 한 자칫 실패할 경우 충격이 커질 위험이 있다. 적어도 60년대에 서구제국들과 미국은 이점에서 혼쭐이 난 것이 사실이다. 독일·프랑스등은 지금껏 뒤치닥거리에 허위적거리고 있고 미국역시 저질화 일로를 걷고있는 대학교육풍토로 고민하고 있음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우리나 저들이나 고등교육이 골칫거리인것은 마찬가지인 셈이니 잠깐 놀부심사를 가져 본다면 기분이 과히 나쁜것만은 아니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최근엔 이웃 일본이라는 나라가 또 대학교육 때문에 고민에 빠져 온나라가 들끓다시피 하고 있다. 그러고보면 우리만이 교육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다른나라들이 60년대에 대학교육문제를 만나게 된 다른 한가지 이유는 아마도 전후 인구폭발의 결과로 생긴 인구파고의 이동 현상일 것이다. 즉 60년대 중반은 2차대전이 끝나면서 나타난 인구폭발 세대가 대학에 입학하기 시작하는 시기다. 60년대 중반이 지나면서부터 세계적으로 대학생소요가 보편화 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스튜던트 파워」세대는 바로 전후 인구폭발세대 이었다는 점에 있어서 서구나 미국이나 일본이나가 공통된다.
70년대 중반부터 이들 각 나라들에서는 「스튜던트 파워」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극단적 반체제운동이나 제3세계에서 수입된 신좌파사상도 선진국들에서는 위세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대신 선진국의 학문적·문화적 영향을 잘 받는 지역으르 확산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70년대 중반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신좌파이론이 일부 반체제학생문화를 이끌어 가기 시작한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전후 인구폭발 현상이 50년대중반, 휴전직후부터 있었다.
70년대 중반부터 우리사회에서 있었던 과열과외, 입시경쟁, 학원소요, 휴교·휴업, 유신체제등. 일련의 현상과 전후인구폭발세대의 인구파고 이동과의 관계를 서구제국에서 60년대의 경우처럼 하나의 맥락속에서 연결지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러면 제일먼저 확연하게 드러나는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는 교육정책에 있어서 제대로 인력수급계획을 세워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60년대초에 와서 군사정권때 대학교육정책에서 인력조정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웠던 것이 그나마, 가장 구체적인 인력정책이었다고 하겠는데 그 내용인즉 당시 13만명이었던 대학생 인구를 7만명으로 줄이겠다는 것이었다. 70년대우리나라교육의 어려움은 그 대부분이 대학교육제도와 관련되어 생긴것이었다해도 좋겠는데, 그 근원을 더듬어 들어가보면 60년대초 교육인구조정정책에 도달하게 된다.
교육인구문제는 어느 한두 분야하고만 관련되는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어느 한 두 부처의 계획만으로, 추진될수도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더구나 앞으로 불과 15년만 지나면 21세기라 해서 마치 인류역사가 새로운 차원에 돌입하기라도 하려는 듯 세계 여러나라들이 너나없이 국가발전계획과 그에 수반되는 인력양성계획수립에 열을 올리고 있는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미국의 경우나 일본의 경우 거국적인 규모로 교육문제를 재검토하고 있는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도 교육개혁심의회가 발족되어 공청회등을 통해 국민여론을 수렴하기 시작햇다. 그러나 국민의 여론을 수렴하는 것이 곧 여론을 따라서 교육계획을 세우는 것이어서는 아니된다. 교육제도의 개혁과 정책의 수립에서 국민들의 여론을 되도록 넓게 수렴하고 반영하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원칙이지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운영하는데에서는 전문적인 능력에 의존하여야 한다.
의사가 환자의 요구에 따라서만 치료할수는 없는 것과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누가 적절한 의사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육정책이나 행정에서는 아직까지 전문성이라는 것이 요구된 적이 없었다. 마치 전문의는 없고 사무직원과 간호원들만 있는 종합병원과도 같은 꼴이다. 누구라도 교육정책을 수립할 수 있고 누구라도 교육행정을 맡을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온 것이 우리나라 현대교육의 역사다.

<여론수렴 중요하나 개혁은 전문인들 일>
단지 하나의 확고부동한 원칙이 있어왔다면 그것은 교육정책이건 행정이건 무조건 관이 전권을 독점해야 하고 민간이나 사학에다 자율권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식민지 교육이래의 관료주의적 원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경제기획원에서 발표한 인력정책 발전방향이 그 동안의 문교부쪽에서 나왔던 계획들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성이 있어 보이는 것도 바로 문제를 다루는 전문성의 수준때문일 것이다. 늘 당연한 구호만 되풀이하던 지난날의 문교정책안보다는 적어도 박사학위 양성계획 하나만이라도 구체적이니 현실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2천1년까지는 과학기술분야에서 박사수가 15만명 수준으로 늘어나야만 인구 1만명당 30명의 박사를 갖는 셈이 되어 선진국수준의 인력을 확보하게 된다거나, 박사인력 양성목표의 조속한 달성을 위해 과학기술원을 박사과정 중심으로 대폭 확충하는 것과 대학원 교육을 활성화하는 것과의 두가지 전략의 장단점을 비교하거나 고등교육 인구를 조정하여 자연과학분야의 비율을 높인다거나 하는 계획에서 강하게 드러나는 의욕과 함께 눈에 띄는 것은 교육문제를 경제적 생산계획처럼 한가지 시각에서만 관찰·비교하는 사고의 단순성이다.
박사수가 늘면 과학화된다는 식의 단순사고가 그것이다. 박사의 수는 과학의 발달과 무관하게도 늘 수 있다. 훌륭한 박사가 나오기 이전에 훌륭한 초중등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 필요한 것이고 그것은 과학원 확충이나 인문계·자연계 대학인구 비율조종같은 식으로 위에서 바뀐다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유능한 과학교사가 확보될 수 있는 교육현장조건이 갖춰지지 않고서는 우수한 박사후보생이 길러질 수 없지 않은가. 그런 계획을 경제정책적 차원에서 세우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사학 의존 고등교육 철저한 규제로 일관>
그런면에서 볼때 사학지원을 위한 정책방안으로 제시된 투자증대유인책은 10년 가뭄에 처음으로 구름을 보는 느낌을 갖게 한다.
전체적으로 관학중심적인 정책발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특히 고등교육은 70%이상이 사학에 의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할이 만큼 정부의 교육정책은 언제나 관학비호 사학규제로 일관해왔다.
돕지 못하겠으면 자율권 만이라도 주는 것이 공정한 처사일 것이다. 사학을 국·공립처럼 지원하고 아울러 교육과 운영에 자율성을 준다면 다양한 사학교육이 발전할 수 있게될 것이고, 사학교육의 질적향상은 곧 국·공립교육의 질적향상을 촉진하게 될 것이다. 공·사립 교육자율성과 다양성을 바탕삼아 경쟁적으로 발달할 때라야 선진국수준의 박사를 양성하거나 21세기 국제경쟁에 대비한 고급인력을 양성하거나 하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학교는 생산공장이 아니다. 인간양성에서 획일주의로는 아무리 박사인구가 많아져도 국가발전에서 성공을 거둘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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