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앵커의 나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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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고개 좀 들어봐요. 조명 맞추게…. 미스 신, 오늘은 화장을 많이 했나 봐.』
『아닌데요. 평소하고 똑같은데, 왜요?』
얼굴에 윤기가 없이 퍼져보여. 옛날엔 반짝반짝 했는데…『…늙어서 그래요』
뉴스 시작하기 5분전 마지막 조명점검을 하다가 생각지도 않았던 내 대답에 담당자는 어이없는 모양이다. 『아니, 벌써 그런 소릴하면 어떡해』하며 일부러 더 신경써서 이것저것 조금씩 움직여 맞춘다.
여하튼 그 날 조명덕분에 젊어 보이는데 성공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3년반. 햇수로 5년. 이렇게 늙어(?)가며 해온 방송인데 너무 젊다는 이유로 겪어야했던
최근의 억울한 사연 몇가지.
며칠 전 진행을 맡았던 6·25특집 프로그램 『전선에서 온 편지』와 『전우를 찾습니다』는 근래에 보기 드물게 각 신문이 호평을 했다. 6·25를 겪은 이들의 아픔과, 가족과 나라에 대한 사랑이 진실하게 표현된 프로그램 이였다고. 그러나 아쉬운 점은 진행자가 너무 젊다는 지적도 함께 있었다.
또 한가지는 2년 전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맡았을 때의 일이다. 이산의 아픔을 얘기하기에는, 그 가족들의 사연을 듣기에는 20대의 진행자가 적당하지 않다는 걱정이었다.
억울한 사연은 사실 TV에 얼굴을 비추게 된 처음부터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별히 뉴스를 맡게 됐기 때문에 들어야했던 『여자 진행자는 앵무새처럼 읽기만 하는 꽃인가. 참다운 앵커우먼은 없다』는 등등의 잦은 기사를 대할 때 면 참으로 곤혹스러움을 느껴야 했다.
우리 TV뉴스 역사와 여자진행자가 등장한 그 짧은 동안에도 좀 나이 들면 젊고 싱싱한 새 사람 찾고, 결혼하면 가정으로 보냈는데 지금와서 외국처럼 중후하고 안정된 경력을 지닌 여성 앵커를 어디가서 구한단 말인가?
6·25특집도 그렇다.6·25를 모르는 전후세대들이 서른이 넘었는데 언제까지 겪은 사람 만 진행하고 출연해야하는가.
이모든 혼잣소리는 마주칠 곳 없이 허공에 사라지고 나는 지독히 억울해 풀죽어 있다 문득 생각해 본다.
그래. 빨리 나이를 먹자. 한 열살쯤 더. 그 때가 되면 중대한 세계적인 뉴스를 놓고 위성으로 각 나라를 연결해 여성진행자가 토론을 이끌어 가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되리라.
그때면 시청자들은 눈물을 감춰가며, 아픔도 이해하며, 프로그램과 겉돌지 않는 완숙한 진행을 하는 여성MC를 TV 화면에서 만나게 되리라.
그때 나는 나의 가장 큰 소원인 「소리」가 아닌 진정한 인간으로 「말」을 할 수 있는 진행자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빨리 나이를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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