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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같이 예리한 무대, 서는 것 자체가 자부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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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호 16면

지순과 광자. 이름에서 풍기는 대로 지고지순하고 가련한 여인과 뭔가에 살짝 미쳐있는 강인한 여자다. 두 여자는 한 사람이다. 지난 3~4월 예술의전당에서 공연된 연극 ‘환도열차’와 17일부터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되는에서 잇달아 주역을 맡은 배우 김정민(34)의 무대 위 두 얼굴이다.


언뜻 배우 같지 않은 평범한 인상이지만 무대에서의 존재감과 흡인력은 상당하다. 젊은 여배우가 끌어가는 무대를 찾아볼 수 없는 지금 한국 연극계에서 단연 빛나는 존재다. 지난해 ‘햇빛샤워’로 동아연극상 연기상도 받았다. 2007년 데뷔작 ‘이름’으로 서울연극제 신인상을 받았던 그는 “제가 운이 좋다. 이번 수상도 ‘환도열차’와 ‘햇빛샤워’가 합쳐진 것 같다”고 겸손히 말했다.


‘대학로 썅년 정신’을 구현하다연극 ‘햇빛샤워’는 2015년 남산예술센터와 극단 이와삼이 공동제작한 창작극으로, 차범석희곡상을 비롯해 김상열연극상, 올해의 공연 베스트 7 등 주요 연극상을 휩쓴 작품. 요즘 연극계에서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통하는 장우재 연출이 험난한 자본주의 사회를 버텨내고 있는 가난한 자들의 삶의 모습을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영화적인 미장센으로 무덤덤하게 그려내 충격을 줬다.


달동네 연탄집 양아들인 순수한 청년 동교네 집 반지하에 살고 있는 광자는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닳고 닳은 여자다. 동교는 동네 사람들에게 연탄을 무료로 나눠주며 따뜻한 세상을 꿈꾸지만 광자는 그런 동교를 비웃는다. 하지만 동교가 부조리한 세상에 좌절해 끝내 삶을 등지자, 광자는 갑자기 씽크홀에 빠진 듯한 절망감에 몸부림친다.


김정민은 광자가 가진 깊은 어둠이 아직도 숙제라고 했다. “광자라는 인물의 두께 자체를 표현하는 게 어렵고도 중요해요. 내면의 어둠에 관한 건데, 물론 저도 아픔을 겪어 봤지만 개인의 아픔을 넘어 작품이 품은 어둠까지 타야 하거든요. 장우재 연출 작품은 항상 그래요. 배우가 그쪽으로 크게 열지 않으면 뭔가 부족해 보일 수밖에 없는 어려운 작업이죠.”


초연 당시 포스터에 등장한 ‘광자는 썅년’이란 도발적인 문구가 화제였다. 하지만 이 무대에서는 욕이 아니라 칭찬이다. “연출님이 평소에 ‘대학로 썅년 정신’이란 말을 써요. 단어 자체는 욕이지만 연출님은 좋은 의미로 쓰시죠. 연극판에서 수동적이지 않고 자기 주장도 펼치면서 주위도 아우를 줄 아는 여성 작업자들에게 좋은 의미로 붙인 말인데 그걸 광자에게 대입시킨 거죠. 저는 그 뉘앙스를 알아서 오히려 힘들었어요. 광자 연기를 하려면 좀 돌아버려야 되는데, 좋은 뜻인 줄 아니까 잘 안되더라고요.”


그는 ‘햇빛샤워’를 두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드러나면서 관객과 만나는 공연”이라고 했다. 다른 작품이 공연의 당위성을 만들고 연출로 드러내는데 반해 ‘햇빛샤워’는 “대본에도, 연출로도 설명할 수 없지만 공감대를 이루게 되는 기운이나 느낌이 있다”는 것이다. 비루한 처지를 벗어나려 수단방법 안 가리다 동교의 죽음에 갑자기 ‘맛이 가 버리는’ 비약적 결말이 대표적이다.


“결국 배우의 몫이죠. 대본에 적시되지 않은 당위성이라 제일 어렵지만 배우는 그걸 해내고 관객에게 이해받아야 해요. 저한테는 이유가 있어요. 치열하게 살아오면서도 아무 조건 없이 다가와 준 유일한 사람인 동교에게 비 맞은 길고양이 같은 동질감이 있었는데, 그게 갑자기 사라진 상실감이 너무 컸겠죠. 동교와 광자가 교감하는 대목에서 둘의 관계와 사건의 당위성까지 전달해야 하는 게 숙제예요.”

연극 ‘햇빛샤워’

“내가 확신 가지면 아무도 의심 안해”4월말 ‘환도열차’ 공연이 끝나자마자 ‘햇빛샤워’ 작업이 시작된 탓에 순식간에 정반대의 캐릭터로 널뛰게 됐지만, 오히려 너무 달라서 편한 면도 있다고. “어중간한 게 아니라 이전 캐릭터를 확 날려버릴 수 있는” 역할이라는 것이다. “사실 연습 초기엔 ‘너, 조용히 얘기할 때 사투리 스멀스멀 나온다’고 지적도 받았죠(웃음). 지순 역으로 만들어놓은 게 너무 강했으니까요.”


‘환도열차’는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갔다 휴전 후 남편을 찾아 서울행 기차를 탔던 새댁 지순이 현대로 타임슬립해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를 목도하는 이야기다. 지순의 서울사투리를 구사하기 위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를 참조했다지만, 김정민은 대사 구현을 넘어 ‘진짜 옛날사람’이 된 듯 대체불능 캐릭터를 창조해 냈다.


“단순히 대사처리만으로는 감당이 안 됐어요. 피난민들 다큐멘터리나 당시 외국기자들이 찍은 영상 등 한국전쟁 자료를 엄청 봤죠. 정말 그 당시 분위기에서 탁 튀어나온 것 같은 정서가 없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봇짐 들고 피난가고 꿀꿀이죽 먹는 옛날 정서에 집중하면서 캐릭터를 만들었어요. 제가 확신 갖고 하니까 아무도 의심 안 하더라고요.”


그는 2010년 서울시극단 ‘7인의 기억’으로 장우재 연출을 만나 그가 이끄는 극단 ‘이와삼’에 들어간 이후 5년 동안 그의 모든 작품에 함께 했다. 예리하게 사회 시스템적 문제를 드러내는 장 연출의 이야기가 배우에게 자부심을 준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지금 누군가 꺼낸다는 것, 이런 작품에 내가 선다는 것 자체가 자부심이죠. 저는 연출님이 ‘칼 들었다’고 표현하는데, 냉철하고 지적이면서 칼날 같은 그 느낌이 너무 좋아요. 연기하기엔 힘들지만 작품만 보면 섹시하죠. 개인적으로도 장우재 ‘작가’의 팬이에요. 신작 나올 때마다 기대되고 설레는 팬이라서 극단에도 들어가게 됐던 거죠.”


그런데 최근 ‘자유활동’을 선언했다. 이제는 주역을 보장받은 온실 같은 극단을 벗어나 더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할 시점이란 생각에서다. “올해부터 외부활동을 시작했어요. 투쟁을 했죠. 나 좀 놔달라고.(웃음) 극단에만 머물면 유연하지 못한 배우가 될 수 있겠다는 걱정이 들었어요. 여기서 주어지는 기회는 너무나 감사하지만, 낯선 환경에도 있어보려고요. 자유롭게 작품을 선택하고, 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과도 만나보고 싶어서 야전으로 나갑니다.”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서울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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