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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재의 Behind & Beyond] 법정 스님 손때 묻은 ‘불일암 이정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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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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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속에 담아둔 오솔길이 하나 있습니다.

법정 스님이 손수 가꾼 불일암으로 난 오솔길입니다.

길은 삼나무 숲 사이에서 시작합니다.

길인 듯 아닌 듯, 숲으로 난 흙길입니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좁습니다.

오시되 길벗 없이 혼자 오라는 듯합니다.

삼나무 숲을 벗어나면 갈림길에 통나무 이정표가 나타납니다.

세로로 기사 이미지 표시만 있습니다.

‘불일암 가는 길’을 줄여 법정 스님이 이리 표시했다고 했습니다.

걷되 말없이 걸으라는 듯합니다.

가리키는 방향으로 250보쯤 걸으면 대나무 숲길입니다.

상좌 스님들이 직접 만들었다는 나무 계단이 단아합니다.

길섶엔 통나무가 덩그러니 놓여 있습니다.

예서 쉬면서 내 안의 나를 한 번쯤 돌아보라는 듯합니다.

10여 년 전, 제 속에 담아둔 오솔길은 이랬습니다.

한번은 벼르고 별러 오솔길을 올랐습니다.

오가며 잠깐씩 들르기만 했을 뿐이라 작정하고 사진 찍을 요량이었습니다.

새벽빛이 숲에 깃들기를 고대했습니다.

대숲에 이르자 난데없이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비를 피해 서둘러 불일암으로 들어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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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의 살림살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끼 낀 담벼락 밑, 두 개의 김장독 뒤로 하필이면 꽃며느리밥풀이 피었습니다.

채마밭, 해우소, 어느 것 하나 넘침이 없습니다.

하나 법정 스님은 이마저도 넘친다며 오대산으로 떠났다고 했습니다.

비 구경, 살림살이 구경 삼매경인데 갑자기 인기척이 났습니다.

도둑질하다 걸린 것처럼 화들짝 놀라 일어섰습니다.

바로 법정 스님이었습니다.

비 덕에 법정 스님과 차 한잔의 호사를 누렸습니다.

송광사에 볼일이 있어 잠깐 들렀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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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그치자마자 대숲으로 내려갔습니다.

대숲의 움직임을 표현하려 카메라 셔터 스피드를 느리게 설정하고 촬영 중이었습니다.

그 순간, 먹물 옷의 법정 스님 일행이 숲길을 내려왔습니다.

셔터 스피드를 다시 조정할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4초의 시간, 스님의 형체는 찍히지 않고 흐르는 듯 표현되었습니다.

법정 스님이 지나며 한마디 툭 던졌습니다.

“숲길 참 좋죠. 바람 소리까지 찍어 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스님 사진 한 장 찍고 가십시오.”

그냥 웃으며 성큼성큼 길을 내려갑니다. 가던 길 그대로 손만 들어 인사를 건넵니다.

손 들어 인사 건네던 그 뒷모습이 제가 본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비움으로 충만을 느끼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뵙고서도 사진 한 장 찍어 두지 못한 아쉬움, 차마 떨치지 못하고 여태도 남았습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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