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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테르테 “제트스키 타고 남중국해 가서 국기 꽂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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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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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대선에서 승리한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 당선자(가운데)가 9일 다바오시 투표소에서 투표를 마친 뒤 한 여성 지지자와 셀카를 찍고 있다. [AP=뉴시스]

막말과 기행으로 ‘필리핀의 트럼프’라는 별명이 붙은 로드리고 두테르테(72) 대통령 당선자가 내정에서는 독재 회귀, 외교에서는 남중국해 영유권을 둘러싼 마찰이 예상된다.

미·호주와 발 맞춘 아키노와 달리
중국과 영유권 담판 벌일 가능성
“필리핀 분해해 재조립, 범죄 소탕”
권위주의 정권 악몽 되살아날 우려
경제 독점 화교가문과 일전 별러
6%대 이어온 성장률 꺾일 수도

두테르테는 10일 “필리핀을 완전 분해해 재조립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면서 정치 체제와 권력구조, 경제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두테르테 캠프의 피터 라비나 대변인은 이날 두테르테가 시장으로 있는 다바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새 대통령(당선자)은 개헌 여론 수렴에 나설 것”이라며 “미국식 대통령 중심제 권력구조를 의회와 지방정부 권한을 강화하는 연방 모델로 전환할 것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로이터통신은 “‘정치적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는 두테르테가 필리핀의 기득권층을 해체하고 부패를 척결하려는 의지”라고 해석했다.

라비나는 “당선자는 필리핀 남부 도서지역의 반군들과 평화협정을 모색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슬람·공산 반군의 세력이 강한 이 지역은 중앙정부의 치안력이 제대로 미치지 않아 주민들의 불안감이 높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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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테르테는 집권하면 “피비린내 나는 범죄와의 전쟁”을 벌이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재판을 거치지 않고 1000명 이상의 범죄자를 처형해 ‘징벌자(Punisher)’로 불린다. 필리핀은 강력 범죄가 연 30% 이상 증가하는 등 치안 불안이 극심하다.

두테르테가 대통령에 당선된 데는 “범죄자 10만 명을 처형해 마닐라만의 물고기들을 살찌우겠다”는 등 범죄 소탕 공약이 도움이 됐다. 그러나 로이터통신은 “두테르테의 초법적 범죄 소탕 주장으로 과거 동남아시아 권위주의 정권의 악몽이 되살아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두테르테의 집권으로 필리핀에서 한국인 범죄 피해는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필리핀에는 9만여 명의 교민이 있고 연간 120만 명의 한국인이 방문한다. 이에 따라 한국인을 노린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필리핀에서는 2013년 이후 매년 10명 이상의 한국인이 살해되고 있다. 한인사회는 두테르테가 “취임 6개월 안에 범죄를 뿌리 뽑겠다”고 약속했고, 다바오를 필리핀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로 바꾼 만큼 치안 개선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

외교에서는 혼선이 예상된다. 두테르테는 유세에서 “남중국해 스카버러섬(중국명 황옌다오·黃巖島)에 제트스키를 타고 가 필리핀 국기를 꽂겠다”, “중국과 담판을 짓겠다”고 말했다. 또 “원유와 천연가스 개발에 중국과 협력할 수 있다”라는 말도 했다. 이는 친미 성향의 베그니노 아키노 대통령이 중국과의 남중국해 분쟁에서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미국·호주 등과 공동 대응하고,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제소하는 등 간접 대응책을 편 것과 대조된다.

미국은 남중국해 분쟁에서 필리핀이 엇박지를 낼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한다.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어니스트 보워 연구원은 “필리핀이 중국과 양자대화에 나설 경우 역내 국가와 갈등을 빚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NYT)도 “두테르테의 거친 언어가 외교적 수사로 바뀔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남중국해 문제를 제외하면 외교정책 방향성은 진공에 가깝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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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정책도 험난할 전망이다. 두테르테는 화교 ‘코후앙코’ 등 정치 가문들의 기득권을 뺏고 연평균 6%대 경제성장의 과실을 나눠 갖겠다고 약속했다. NYT에 따르면 코후앙코 가문은 필리핀 국내총생산(GDP)의 76%를 장악하고 있다. 아키노 대통령도 코후앙코 가문 출신이다. 하원의 80%, 지방자치단체장 대다수가 이 가문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두테르테가 40년 넘게 정치·경제를 독점한 이들의 기득권을 빼앗는 것은 힘든 싸움이 될 전망이다. 신용평가기관 S&P글로벌은 9일 “정치·경제 엘리트와 전면전에 나선다면 두테르테 정권의 불확실성은 더욱 커질 것”이라며 “타협과 적응을 통해 리더십을 공고히 하기까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동현 기자 offram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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