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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산업 구조조정 큰 그림으로 국민·정치권과 소통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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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나현철
나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최정동
최정동 기자 중앙일보 부장

구조조정이 급물살을 타면서 ‘한국판 양적완화’ 논란이 달아올랐다. 막대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한국은행의 발권력 동원이 불가피하다는 주장과 정부 재정 투입이 우선이라는 주장이 첨예하게 맞선다. 이 과정에서 한국판 양적완화의 정체성과 구조조정의 목표와 전략에 대한 혼선만 가중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1980년대 중후반 청와대 경제수석과 재무부 장관을 지내며 여소야대하에서 한국 산업 사상 첫 대대적 구조조정을 주도했던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을 만나 한국판 양적완화 논란과 구조조정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사공 이사장은 “구조조정과 한국판 양적완화의 개념이 분명하지 않아 생긴 불필요한 논란”이라며 “정부와 한은이 제 역할을 하면서 야당과도 적극적으로 소통해 국가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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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은 “오해의 소지가 큰 ‘한국판 양적완화’라는 말을 정부가 이제 접어야 한다”며 “국가 경쟁력을 높일 ‘큰 그림’을 내놓고 국민과 국회를 설득하는 게 순서”라고 지적했다. [사진 최정동 기자]


[나현철의 직격 인터뷰] 여소야대 경험한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


한국판 양적완화는 애초 가계부채와 구조조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책은행 채권을 사주자는 얘기로 시작됐다. 그런데 지금은 기업 구조조정을 위해 국책은행 자본을 확충해 주자는 얘기로 바뀌었다.
“정책은 목적이 뚜렷하고 구체성이 있어야 제대로 집행된다. 그러려면 용어부터 명확해야 한다. 양적완화라는 말은 경제학 교과서에 들어갈 만큼 새롭게 정립된 개념이다.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한 단기 수요 진작 차원에서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하는 비전통적 수단을 일컫는다. 그런데 지금 얘기는 수요 측면이 아니라 공급 측면의 구조조정을 하자는 것이다. 선거 국면에서 구조조정이라는 말이 안 먹히니 그랬다고 이해하지만 양적완화라는 말은 피하는 게 좋다. 오해의 소지가 크고 괜한 데 시간이 낭비된다.”
개념의 혼란을 말씀하셨는데, 지금 정부가 말하는 구조조정이 정확히 뭔지 모르겠다는 지적도 있다.
“구조조정이라는 말 자체가 포괄적 개념이다. 예를 들어 인력 감축이나 기업의 재무구조 개선도 구조조정이다. 산업 차원에서 기업을 통폐합하는 것 또한 구조조정이다. 그런데 이 중 어떤 게 목표인지 확실치 않다. 정부가 어떤 차원에서 구조조정을 하겠다는 건지 분명히 해야 한다. 조선·해운업을 산업 차원에서 구조조정한다면 현재 세계적인 경기와 공급 상황을 감안해 경쟁력과 효율성을 어떻게 높일지를 제시해야 한다. 인력 감축만 해도 실업대책과 근로자 재훈련에 재정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정부와 한은이 어떤 방법을 쓸 수 있고 각자의 장단점이 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는 구조조정이 한시가 급하니 자금을 마련해야 한다고 한다.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거나 공적자금 조성은 법적 요건이나 정치 상황 때문에 어렵고 한은의 발권력 동원이 가장 빠르고 확실하다는 얘기다.
“왜 시간이 그렇게 급박한지부터 설명해야 한다. 조선·해운업과 관련해서도 몇 개 회사가 부도나고 정리되면 해결될 일인지, 전체 산업 차원의 문제인지가 설명되지 않고 있다. 한은이 개입하려면 거시경제적 차원에서 그것을 그냥 뒀을 때 대량 실업이 일어난다든지 금융 경색이 생겨 금융 안정이 깨진다든지 하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무엇이 시급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고 국회나 정치권도 설득해야 한다. 정면 돌파를 해야 한다.”
정부가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 양적완화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다. 장관부터 실무 책임자까지 같은 개념을 가지고 같은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해석이 다양하게 이뤄질 수 있으니 논란이 뒤따른다. 양적완화라는 말은 이제 그만 접어야 한다. 다음으로 정부는 경제부총리의 주도로 구조조정의 ‘큰 그림’을 내놓고 한은이 나설 수 있는 명분과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정부가 한은에 압력을 넣어서가 아니라 한은이 스스로 할 일을 당당하게 하도록 해야 한다.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면서 정치권도 설득해야 한다.”
‘큰 그림’ 얘기가 나올 때마다 정부는 통상 마찰 우려 때문에 함부로 방향을 제시하거나 사인을 주기 어렵다고 한다. 대놓고 앞에 나설 수 없다는 거다.
“이해한다. 미국 등 개별 국가나 세계무역기구(WTO)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싱크탱크의 전문가들이 참여해 잘 따져야 할 필요는 있다. 하지만 거시경제 차원의 대응이라는 대내외 명분이 확실하면 된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미국의 경우 정부와 중앙은행이 직접 개입한 바 있다. 일본의 양적완화도 마찬가지다. 몇 년 전부터 엔화값이 크게 떨어졌지만 미국이 가만히 있다가 최근에 문제를 삼기 시작했다. 거시정책으로서의 양적완화가 아니라 환율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명분도 중요하다. 대량 실업이 일어나고 거시경제 전체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사전에 막으려는 조치로서의 근거가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정부가 보조금을 주면서 빅딜을 시키면 문제가 되겠지만 채권자나 이해당사자가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건 괜찮다.”
한은도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은의 설립 목적이 물가 안정과 금융 안정의 유지다. 또 우리 경제가 건전하게 발전해 나가는 데 도움이 되도록 정부 재정정책과 조화를 이룰 책임도 주어져 있다. 따라서 현재 정부가 압력을 넣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게 옳지 않지만 한은이 정부에 밀려서 협상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옳지 않다. 국민 눈에는 둘 다 옳게 보이지 않는다. 유럽중앙은행(ECB)을 보면 독일이 정치적으로 다양한 압력을 넣고 있다. 하지만 마리오 드라기 총재는 ‘ECB는 독립된 기구이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한다. 정치적 압력에 휘둘리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양적완화를 안 했으면 지금쯤 유럽 경제는 심각한 침체(deep recession)에 빠졌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얘기한다. 한은도 적극적으로 할 일을 해야 한다.”
정부가 여소야대 정치 상황의 어려움을 많이 얘기한다. 하지만 그동안 두 차례의 성공적인 구조조정은 모두 여소야대 상황에서 이뤄졌다.
“내용을 보면 과거 구조조정은 지금과 사정이 달랐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을 때 구조조정을 하라는 조건이 있었다. 외부의 강요가 있었던 것이다. 정치적 부담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80년대 중반의 부실기업 정리는 비공개로 제3자 인수 방식을 택해 어려움이 컸다. 2차 오일쇼크 영향으로 지금처럼 어려움을 겪고 있던 해운과 해외 건설이 주된 대상이었다. 그런데 비공개로 해야만 했다. 대상 기업의 부실이 드러나면 은행 부실이 드러나고, 곧바로 외환 차입 길이 막혀 국가 부도 위험에 노출된다. 13대 총선으로 여소야대가 된 상황에서 정치자금설이나 특혜 시비가 일 수밖에 없었다. 17년 만에 부활된 국정감사, 청문회, 검찰 조사를 거쳐야 했다. 그러나 78개에 이르는 부실기업 정리는 여소야대 국회에서도 사후 추인됐다.”
당시 구조조정 성공의 비결은 뭔가.
“소통이다. 당시 국회 재무위원회 29명 중 여당 의원은 12명에 불과했다. 평화민주당과 통일민주당·공화당 등 야당이 압도적 과반수였다. 그럼에도 명확한 논리와 큰 그림으로 야당을 설득하니 통했다. 어려워도 정면 돌파밖에 답이 없다. 기업구조조정촉진법이나 원샷법으로 부족하면 정부가 국회를 설득해 산업합리화 관련법도 필요하면 만들어야 한다.”
소통은 어떻게 해야 하나.
“여소야대일수록 열린 리더십이 필요하다. 대통령은 물론 장관·차관·국장·과장까지 야당과 언론을 수시로 만나야 한다. 지금은 언론을 상대하면 ‘잘해야 본전’이라는 인식이 공무원 사이에 퍼져 있다. 적극적 언론 접촉에서 생긴 실수를 문책하기보다 잘한 일을 높게 평가하는 인사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러려면 장관에게 인사권을 줘야 한다. 장관이 ‘너 청문회 안 세운다. 내가 책임진다’고 할 수 있어야 공무원이 후환을 두려워해 할 일을 못하는 ‘변양호 신드롬’이 생기지 않는다. 물론 대언론, 대국민 소통에 앞서 내부 소통도 중요하다. 과(課)끼리, 국(局)끼리, 부처끼리 얘기가 되고 청와대와의 소통도 중요하다. 전면에 나서지 않는 청와대 비서진의 조정 역할도 중요하다.”
구조조정을 하기 전 정부와 국책은행의 책임을 먼저 물어야 한다는 시각이 있다.
“기업이나 금융기관 차원의 문제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게 아니고 쭉 축적된 것이다. 따라서 법적 책임을 묻는 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순서가 아니다. 이보다 앞으로 분담할 경제적인 책임과 비용을 얘기해야 한다. 경영진·대주주·채권단이 당연히 분담해야겠지만 노조와 근로자의 책임 분담도 중요하다. 조선업을 보면 노조 반발로 인력 감축을 못하니 일감을 만들어야 하고, 덤핑 수주로 이를 해결해온 영향이 크다. 물론 근로자들이 일방적으로 희생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실직한 근로자들의 실업대책과 재교육은 국가가 확실하게 책임져야겠지만 노조도 비효율적 일자리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해선 안 된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정부와 한은, 정치권, 노조 같은 이해당사자가 명심할 점은.
“세계가 주시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외환위기 직전에 세계 투자자들이 관심 있게 지켜보던 금융개혁입법이 실패했다. 태국 바트화 위기의 한국 전염에 일조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 정부와 국회가 개혁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지 봤는데 아니었다. 그 자체가 환란의 주원인은 아니지만 싹수가 안 보인다는 외국인 투자자의 판단이 사태에 큰 역할을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정부와 중앙은행, 정치권의 성숙도와 위기 돌파 능력·의지를 확실히 보여야 한다. 그걸 강조하고 싶다.”
사공일 이사장은…

1940년 경북 군위에서 태어나 서울대 상과대학을 졸업하고 UCLA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부원장, 산업연구원(KIET) 원장을 거쳐 83~87년 최장수 청와대 경제수석, 87~88년 재무부 장관을 각각 역임했다. 이명박 정부 때 대통령 경제특별보좌관,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위원장, G20정상회의준비위원회 위원장, 한국무역협회 회장 등을 맡았다. 현재 93년 설립한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과 중앙일보 고문을 맡고 있다.

글=나현철 논설위원
사진=최정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