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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때 주고 받았던 선물들 한 곳에 모아 이별의 아픔 달래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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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8호 24면

1 전시를 공동기획한 드라젠 그루비시치(왼쪽)와 올라아 비스티카. 한때 연인이었던 두 사람은 이제 동업자가 되어 전세계를 돌아다닌다.

없다고 말하지 마라. 혈기왕성한 고백이 넘쳐나는 소싯적에 주고 받은 편지를 보고 얼굴이 화끈했던 순간이, 버릴까 말까를 수백 번 고민하다 아직도 버리지 못한 그의 흔적이 내 방구석 어딘가에 절대 남아있지 않다고 말이다. 어쩌면 그건 매우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한 순간에 유효기간이 다해버린 물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지 못하니 말이다. 분명 영원할 줄 알았는데, 내게 무엇보다 소중한 물건이었는데, 한순간에 처치곤란한 쓰레기가 되어버리다니 배신감은 물론 허무하기조차 하다.


지난 사랑의 전리품을 태워버리지도, 돌려주지도 못하고 떠안고 있는 그대라면 제주 탑동 아라리오뮤지엄 동문모텔Ⅱ로 가보라. 그곳에서 열리는 전시 ‘실연에 관한 박물관’(5월 5일~9월 25일)을 감상하다 보면 어느새 신기한 치유를 경험하게 될 터이니.

2 이곳에 진열된 물건은 모두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넓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이를테면 나의 취향과 맞지 않아 몇 번 신지 못한 신발이나 그대로 쌓아둔 속옷 같은 것은 누구나 있기 마련이기에.

3 ‘사랑의 위성’을 테마로 꾸며진 3층 전경. 우두커니 놓여진 곰인형부터 웨딩드레스까지 사연만큼이나 다양한 기증품이 눈에 띈다.

4 고기에 지방을 주입할 때 쓰는 라딩 니들.

5 한때 쫓았던 꿈이 서린 트로피. 하지만 그로 인해 가족들을 잃은 사연자는 “트로피를 반드시 세우지 말고 눕혀달라”고 당부했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 있다는 것 보여주고 싶었어요” 시작은 단순했다. 낭만적인 도시로 알려진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에서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조각가 드라젠 그루비시치(47)와 영화 프로듀서 올링카 비스티카(47)는 여느 연인들처럼 열렬히 사랑했지만 더 이상 불타오르지 않는 순간을 맞았다.


이들의 이야기가 다른 연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끝맺음 방식이다. 남은 물건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던 이들은 그것을 이용해 전시를 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실연에 관한 박물관’(Museum of Broken Relationships)의 단서가 생겨난 셈이다.


2006년 이들이 선택한 첫 번째 아이템은 토끼 인형 바니. 한 사람이 여행갈 때면 데려가 함께 사진을 찍어 보내주곤 했던, 둘의 메신저 같은 아이였다. 올링카는 “우리 사연을 중심으로 한 공간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사랑을 잃으면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혼자라고 생각하기에 더 우울해지는 거죠. 하지만 똑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저희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녹아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호응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기증품을 받는다는 소식은 친구들을 통해 알음알음 알려졌지만 2주 만에 42개의 이야기가 모였다. 광장에서, 바에서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러브레터나 곰인형 같은 물건이 많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잠시, 의외의 물건들이 쏟아졌다. ‘우리들의 사랑보다 오래 간다’는 견고한 의족, 함께 당한 사고 때 찍은 엑스레이 사진 위에 쓴 편지처럼 무궁무진했다.


그렇게 컨테이너 박스에서 시작된 전시는 10년간 22개국 35개 도시를 돌았다. 자그레브에 정식 박물관도 생겼고 다음달엔 미국 LA에 지점까지 개관할 예정이다. 바니 인형에서 시작된 기증품도 3000개를 넘어섰으니 그만큼 많은 이야기가 쌓인 셈이다. 드라젠은 “나라마다 특징이 다르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만 7번의 전시를 진행했으니 기증품은 미국이 제일 많아요. 하지만 멕시코시티에서 할 때는 하루에만 200여 개가 들어와서 행복한 비명을 질렀죠. 한국은 사연이 굉장히 길다는 게 특징이예요. 서양에서는 1~2줄짜리 사연도 많은데 한국 사람들의 이야기는 책을 읽는 것처럼 자세했어요. 덕분에 가족과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유난히 고등학교 시절이 힘들다는 것도요. 많은 분들이 그때 이야기를 언급했거든요.”

6 죽음과 상실의 정서가 어린 4층 ‘그대여 안녕’ 섹션. 자동차·스피커 등 끈끈한 가족애를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다.

7 과거 뚱뚱한 나와의 결별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동서양 모두 청바지를 선택했다.

8 속옷 역시 개인의 취향이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도, 어울리지 않던 옷들도 이제는 안녕.

웨딩드레스·수저·고소장 등 다양한 이별의 흔적 한국 전시는 이런 토대 위에서 진행됐다. 2월 14일부터 한 달간 83점의 기증품이 도착했고 그중 67점을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다. 해외에서 온 기증품까지 총 113점의 사연이 리디북스 페이퍼에 빼곡히 적혀 있다. 사연이 고스란히 담긴 책『실연의 박물관』(아르테)도 출간됐다. 그 내밀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분명 익명의 전시품인데도 굉장히 친한 사람의 물건인 것처럼 느껴진다.


올링카는 “전시품은 보통 100개 전후로 조정한다”고 설명했다. “한 분 한 분의 이야기가 모두 소중하지만 개개인의 이야기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죠. 대신 모든 기증품은 자그레브에서 영구소장하고 대신 시기에 따라 교체 전시됩니다. 현지의 감성이 더해지니 같은 전시라도 평범한 순회전과 달리 생명체처럼 변화한다고 할까요. 한국에서는 슬픈 사연들이 많아서 해외 기증품을 비교적 재미있고 위트 있는 감정을 전할 수 있는 것들로 골랐습니다.”


2~5층으로 이어지는 전시는 층마다 다른 테마를 갖고 있다. 2층 ‘그 사람을 위한 작은 박물관’은 가장 사적이면서도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법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인트로 성격을 띈다. 이를테면 입구에 놓인 슬로베니아에서 온 라딩 니들은 너무 낯선 도구다. 꿩고기를 더 맛있게 굽기 위해 지방을 더 주입하는 기구가 필요한 사람이 우리 중에 누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 물건이 바로 천국의 중심이었다”고 고백하는 사연자의 심정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계 역시 사랑하는 이를 축으로 움직이기에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그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그가 좋아하는 옷을 입는 건 지극히 보편타당한 일이다.


3층 ‘사랑의 위성’에서는 남녀관계에 얽힌 보다 다양한 편린을 만날 수 있다. 멕시코ㆍ일본ㆍ독일에서 입고 제주에 착륙한 웨딩드레스는 결혼이 사랑의 결실이 아닐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가 한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을 때 사용했던 수저나 데이트 폭력으로 인한 고소장이 한 테이블에 놓여져 있음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한낱 종이가 관계의 끝을 알리기도 하고 영원히 반짝일 것 같던 보석이 심장을 아리게 하는 비수가 될 수도 있음을 그때는 미처 몰랐을 테니 말이다.


전반부가 만국 공통어로 구성됐다면 후반부는 보다 한국적이다. 4층의 ‘그대여 안녕’은 사별에 관한 절절함이 주를 이룬다. 5층 ‘가지 않은 길’은 이전의 나와 헤어지는 사연을 담은 섹션으로 한국 전시에 새로 추가된 부분이다. 제주 4ㆍ3 때 끌려가던 남편을 향해 “이거라도 잡수시라”며 던졌던 찐빵이나 사별 후 7년간 앞마당에 덩그라니 세워뒀던 코란도를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나의 이야기로 옮겨온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두 사람은 입을 모아 “가장 기억에 남는 물건은 꼽을 수 없다”고 했다. 그날의 감정에 따라 수시로 바뀔 뿐더러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더 이입하게 되는 오브제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특히 이 물건들은 다른 박물관과 달리 살아있는 사람들의 현재진행형인 이야기니 더욱 부담스러울 지도 모르겠다.


이제 자그레브 실연 박물관에는 이별 직후 물건을 싸들고 오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카운터에 물건을 내려놓고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으며 위로받고 돌아간다. 몇 번의 이별을 경험한 우리도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말이 동화에만 나오는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 전시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사랑했던 시절에 대한 향수? 이별의 통과의례에 대한 촉매제? 어떤 것이라도 좋다. 5월은 사랑하기 좋은 계절이고, 제주는 추억을 묻어두기 좋은 곳이다. 그대의 새출발을 응원한다. ●


제주 글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사진 아라리오뮤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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