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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3)-제82화 출판의 길 40년(46)-일제의 금서정책(상)<1909년∼3·1운동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한말 일제가 우리의 주권을 빼앗고 처음으로 금서처분의 폭거를 자행한 것은 1909년 5월5일자로 기록되고 있다.
이미 1905년에 강압으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뒤인지라 그들이 대한제국을 완전 병탐하려는 절차상 막바지 단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날짜에 떨어진 금서 처분은 모두 10종이었다.
현채저 『중등교과동국사략』(2책), 『유년필참』(2책), 『월남망국사』 『유년필견역의』(2책) 등 4종과 이상익저 『월남망국사』, 김대희저 『20세기조선론』, 안국선저 『금수회의』, 윤치호저 『우순소리』, 이원저 『동국문헌보유』권3 등이다.
1977년 『신동아』지는 1월호 별책부록에 일정하의 금서목록을 정리하여 소개했다.
이 자료에 의하면 일정하의 발금도서는 자그마치 4백85종에 이르고 있다.
이야기는 다시 1909년 그해의 있었던 일을 살펴보자. 그해 7월엔 서슬이 퍼런 통감부경무총장이란 자가 당시 서울의 신문사 사장을 불러놓고 한일관계를 이간시켜 부화스럽게 한다거나 항일무력활동을 보도해서는 안된다는 등 4개항의 주의사항을 시달했다.
또 그보다 앞서 그해 2월엔 일제시대를 통하여 계속 우리의 출판활동을 억누른 사전 사후검열을 규정한 출판법이 공포되었다.
그런데 앞에 소개된 금서도서 10종은 모두 초판이 나온 뒤 1년이상 된 것이며, 오래된 책은 3년전에 출판되어 이미 3판씩이나 많이 팔렸던 기간서들을 치안방해를 이유로 내걸고 통감부의 경찰권이 발동된 것이다.
이렇게 일제침략으로 인한 금서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나는 앞으로 일정하의 금서를 몇번에 걸쳐 말하기 위하여 편의상 시기를 3기로 구분한다.
제1기는 1909년부터 1919년 3·1운동까지의 10년간을, 제2기는 그 다음부터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해인 1936년까지의 17년간을, 제3기는 그 다음부터 광복하던 해까지 9년간을, 이렇게 나누어 놓고 각시기의 특징적인 것을 살려보기로 한다.
먼저 제1기 금서의 수는 모두 1백17종. 이 시기의 특징이라면 첫째, 이 1백17종 중 7종을 뺀 나머지 1백10종이 모두 정식 한일합병도 되기 이전에 나왔던 책이란 것이고, 둘째는 1백17종 중에 대한제국 학부에서 편찬한 초등·고등의 각종 교과서가 32종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이 시기의 금서상황을 이야기한다면 이민족의 통치아래서 독립을 주장할 수 없으며 자민족의 역사·지리·풍속 등 고유한 문화전통조차 자손들에게 가르치고 전달할 수 없게 하겠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이 시기의 금서중 유형적으로 대표적인 것 2종을 뽑아서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
일제에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기 전후의 40년에 걸친 상소로, 창의로, 무력으로 항쟁한 최익현의 글인 『면암선생문집』을 든다. 이 책은 1908년 간행이다. 본집 40권, 부록 4권, 속집2권으로 되었다. 이 책 속에는 『지부복궐척화의소』란 간절한 상소문이 있다.
면암선생은 궁궐문 앞에 엎드려 일본과는 화의(지금의 조약)를 맺는 것은 그동안 몇번이고 속았으니 조약체결을 배척하라는 상소문을 내놓고 이 상소가 관철 안되면 자기가 가지고 간 도끼로 자기의 목을 쳐달라는 우국충정이 지극한 글들인 것이다.
또 하나는 1907년에 발간된 현채저인 『유년필독』을 든다. 이 책은 당시 청소년들에게 가장 많이 읽혔던 책이라 한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주체적 역사의식을 통하여 애국정신을 고취한 책이다.
이 책 제4권엔 독립가 3편이 수록되어 있다. 정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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