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 건강학 (전이현상) 유계준<연세대 의대 정신과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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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5월의 싱그러운 아침. 모처럼 출근에서 오는 압박감에서 벗어난 일요일이다. 아침나절에는 집안 손질을 좀 해야지하고 며칠전부터 마음에 두었던 고장난 선풍기를 햇볕이 따스한 마룻바닥에 펼쳐 놓았다. 처음 시작할 때는 쉽게 고쳐지려니 생각한 것이 벌써 두시간 동안 끙끙거리게 되자 속에서 갑갑증이 슬며시 고개를 쳐든다.
이때 부인이 전문지식도 없는 수리공에게나 맡기고 남들처럼 나들이 가지 않는다고 핀잔을 준다.
그렇지 않아도 스스로 화나는것을 참고 있던 터에 그만 속이 상해 기계를 거칠게 다루다가 손가락까지 다친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다가 뒤에 놓인 물그릇까지 엎지르자 참고 있던 감정이 폭발되고 만다.
엉겁결에 욕을 먹은 부인이 화가나서 자신의 피난처인 부엌으로 들어가 보니 아들 녀석이 볶기를 해먹는다고 부엌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아이에게 신경질을 부렸고 야단맞은 아들은 지나가던 고양이를 발로 차버렸다. 싱그럽던 5월의 아침이 이가정에서는 산산조각이 나버린 셈이다.
현명한 부인이 고장난 선풍기를 고치느라 땀흘리는 남편에게 따뜻한 코피잔을 권했더라면 자기마음을 알아주는 고마움에 처음부터 화가 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비록 물그릇을 엎질렀어도 자기 잘못으로 돌렸을 것이다.
어떤 부부는 부부싸움이 있으면 서로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경우를 대비해 두 사람은 약속을 해 두였다.
남편의 마음이 더 상해 있다면 부인이 차를 끓여 말없이 대접한다. 반대로 부인의 감정이 더 악화되었을 때 남편은 화초에 물을 주거나 음악을 듣기로 했다.
자기 스스로 억압할수없는 욕망이나 감정을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옮기는 것을 전이(전이)현상이라고 한다.
회사에서 윗사람에게 야단맞은 감정을 아랫사람에게 옮기고, 아랫사람은 그 감정을 집안으로 옮겨가면 부인과 아이들은 억울하지만 당할 수밖에 없다.
전이감정은 누구에게나 쉽사리 일어날수 있는 감정이지만 성숙된 인격을 가진 사람일수록 스스로 자제하는 능력을 갖춘다. 또한 다른 사람이 쏟아놓는 전이감정을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닌 그 사람의 것으로 돌릴수 있는 아량을 가지고 있다.
요즘같이 복잡한 사회생활에서 모든 감정을, 그것도 자신의 것을 더 보태서 남에게 쏟아 붓는 다면 본인이나 주위사람이 견뎌나기가 힘들다. 가정의 화목, 특히 부부간의 원만한 생활을 위해서는 누구든 오늘부터라도 성숙한 인격으로 전이현상을 자신에게서 마무리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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