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매거진M|강유정의 까칠한 시선] 경성의 진짜 얼굴을 탐구하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기사 이미지

2000년대 국문학계에서는 경성(京城)이 중심 담론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시기 새롭게 부각된 경성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일제강점기 수도 경성과는 다른 곳이었다. 갓 유입된 외국 문물이 격랑을 가져온 문화의 멜팅 팟(Melting Pot·여러 요소가 하나로 융합 및 동화되는 현상이나 장소)이었고, 지금보다 훨씬 더 다양한 관점이 존재했던 격동의 공간이었다. 기생과 여학생이 공존하고, ‘모단 걸’과 전통적 여성이 함께 걷던 거리, 동경 유학생이 일본에서 자유연애를 경험하고 돌아와 정혼한 아내에게 당당히 결별을 고했던 공간, 그런 복잡다단한 변모의 도시가 바로 경성인 것이다.

미시사의 틀에서 경성이 주목받은 지 10여 년쯤 지나자, 이러한 지식적 기반에 허구적 상상력을 녹인 작품이 하나둘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아마 경성을 배경으로 색다른 공포를 선보였던 ‘기담’(2007, 정식·정범식 감독)이 첫 시작 아니었을까. 경성을 세련되면서도 고풍스러운 매혹의 공간으로 그리는 데 성공한 작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최동훈 감독의 ‘암살’(2015)은 경성을 소재로 다룬 작품의 정점이 되었다. ‘암살’에서 경성은 미츠코시 백화점과 항일 독립투사, 서양에서 건너온 투피스와 일본 여인의 기모노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앤티크한 안경과 자동차가 스크린에 등장하고, 그 시절 정취를 느끼게 하는 전차가 화면을 차지한다. 여기에 총기도 투입된다. 경성은 총기 사용이 가능했던, 그러니까 전쟁 중인 근대 도시였음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이다.

‘경성학교:사라진 소녀들’(2015, 이해영 감독)에서 다뤄진 경성도 ‘암살’에 등장한 모습의 연장선이다. 서구식 교육 시스템을 갖춘 여학교, 일제강점기 생체 실험 같은 개별적 요소들이 경성의 미장센을 통해 서사화됐다. 말하자면 경성은 고풍스러운 미장센과 격렬한 서사가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지금까지 우리가 마음껏 활용하지 못한 이야기의 보고다. 이런 흐름을 고스란히 보여 주듯, 올해 개봉하는 영화 중 여러 편이 경성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해어화’(4월 13일 개봉, 박흥식 감독) ‘아가씨’(6월 개봉 예정, 박찬욱 감독) ‘밀정’(하반기 개봉 예정, 김지운 감독) ‘덕혜옹주’(8월 개봉 예정, 허진호 감독) 등이 그 작품이다.

이미 개봉한 ‘해어화’를 보면, 최근 영화들이 왜 그렇게 경성에 눈독 들이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해어화’가 주목한 경성은 기생과 신여성, 정가(正歌·가곡, 가사, 시조를 아우르는 전통 성악의 한 갈래)와 대중가요가 공존하던 문화 격전지다. 새로운 문화와 전통적 세계가 한데 뒤섞인 공간이 경성인 셈이다. 정가에 빼어난 재주를 지닌 기생과 대중가요에 적합한 목소리를 가진 여가수는 ‘해어화’가 기댄 중심적 갈등의 축이다.

문제는 경성을 단순히 배경으로만 차용할 때, 결국 그 시대와 공간은 이야기의 액세서리에 불과해진다. 아름답고 낯선 볼거리 요소로만 활용된 경성은 차별성이 사라진 그저 잘 만든 세트장일 뿐이다. 물론 80여 년 전 복고풍 패션과 문화를 보는 것은 근대 박물관 체험처럼 흥미로워서 관객의 눈길을 끈다.

그러나 근대는 대립적 정서와 정신의 충돌이 미장센으로 드러나던 특별한 시공간이다. 정가가 지고 대중가요가 떠오른 것은, 곧 하나의 시대가 사라지고 다른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긴 머리의 기생보다 짧은 머리의 신여성이 더 매혹적이던 공간, 그 갈등과 혼돈과 충돌과 섞임이 바로 근대 도시 경성의 매력이다. 아쉽게도 경성을 소재로 등장하는 대부분의 영화들은 복고적인 볼거리를 전시하는 데 지나치게 집중한다. 볼거리는 갈등을 화려하게 꾸며 줄 수 있지만, 그 자체가 갈등으로 완성될 수는 없다. 아름다운 옷과 이채로운 공간은 눈길을 끌 뿐 마음까지 끌 수 없다는 뜻이다. 예컨대 나쓰메 소세키(1867~1916)가 쓴 소설들은 메이지 시대의 정수를 보여 준다고 평가받는다. 아마 진짜 경성의 모습도 단지 볼거리로 그려지는 게 아닌 시대의 정수를 좇는 데서 발견될 것이다. 경성은 그렇게 소비하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훨씬 다양한 매력을 지닌 시공간이다.

 강유정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