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한일국교정상화 20년맞아 다시찾아본 문명의 젖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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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오까야마의 덴만야버스 터미널에서 우시마도항까지는 급행버스로 1시간 거리였다. 순백의 깨끗하고 맛있는 소금으로 유명한 가시노의 옛 거리를 벗어나 작은 고개를 넘자 우시마도의 긴 포구가 눈앞에 펼쳐진다.
해안을 따라 고색 짙은 옛 가옥듈이 줄지어 있고 뒷산 중턱에 대가람의 지붕이 녹음속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본연사다. 우뚝 솟은 3층탑이 돋보인다.
절 뒤의 높은 구룽지에는 동양에서 제일 규모가 크다는 3천5백그루의 올리브원이 보인다.
이곳 사람들은 우시마도를 지중해의 에게해에 비유한다. 통신사 일행이 왕복길을 합해 우시마도에 기항한것은 모두 14차례였다.
처음에는 본연사가 이들의 숙사였다.
그러나 통신사 접대에 남다른정성을 기울인 오까야마번이 따로 별장을 겸한 영빈관을 지어 1682년 7번째 통신사때부터는 이 영빈관이 숙사가 된다.
절은 지금도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번화했던 선린교류의 발자취를 더듬을수 있으나 장엄·화려했던 것으로 알려진 영빈관은 없어진지 오래다.

<모두 14차례나 기항|본연사에 글씨 남겨
본연사앞에서 버스를 내려 우선 영빈관 터를 찾아 보기로 했다. 창살문이 달린 오래된 목조 건물들이 양쪽으로 늘어선 골목길을 몇차례 오르내린 끝에 「금해염업주식회사 우창료」 란 작은 간판이 붙은 목조 2층건물을 찾아냈다.
전에 와본일이 있는 이진희교수가 『바로 이 건물이 영빈관이 있던곳』이라고 반색을 했다.
건물은 나무색깔이 검게 바래고 회칠한 벽의 이곳저곳에 금이 간데다 크기만해 오래된 창고같은 인상이었다.
통신사들을 맞을 때의 영빈관에는 7개의 건물이 들어서 있고 다따미 2백70장을 깔아야하는 넓이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3사를 접대한 연회석이 다따미 32장의 크기였단다.
본연사는 영빈관에서 6백∼7백m정도 떨어진 항구를 한눈에 내려다 볼수있는 산 중턱에 있었다. 가파른 층계를 올라가 절문올 들어서니 규모가 제법 큰 본당, 삼중탑, 번신당등이 고색창연하게 서 있다. 마당의 아름들이 소철이 연륜을 말해준다. 1천년의 역사를 가진 절이다.
절에는 1643년의 총사관 신유·제술관 박안기, 1655년의 정사 조형·부사 유양(양)등 이곳에 묵었던 통신사 일행들의 글이 남아있다. 숙사를 영빈관으로 옮긴 뒤인 1711년의 부사 임수간, 종사관 이방산, 제술관 이지, 서기 남성중의 글도 있다는 이교수의 얘기다.
우시마도의 통신사 접대역은 봉록 31만5천섬의 오까야마번이었다. 이곳의 접대준비도 다른 번과 마찬가지로 반년전부터 시작됐다.
신공일행이 부산을 떠나는 것이 6월20일, 우시마도에 입항하는 것이 9월1일인데 오까야마번에서는 배가 부산을 떠나기도 전인 5월16일까지 3사가 묵을 영빈관이나 그밖의 수행원이 들어갈 학사관, 상관숙사, 중관숙사, 하관숙사등에 대한 수리나 가구등의 비치를 이미 모두 끝내고 있다.
신공의 숙사는 학사관인데 본연사근처에 있었던 모양이다. 『해유녹』을 보면 신공은 오까야마번이 마련한 이 숙사가 몹시 마음에 들었던것 같다.
『사관의 공구하는 것과 가구들은 도모우라에서와 같이 풍성하다. 옆에 탕이 하나 있는데 꼭대기에 구리기둥을 세워 높이 반공중에 솟아있다. 이름을 본연사라고 한다. 서폭에 항구를 뚫어 한집을 지어 놓았는데 절승이다. 현판에 학사관이라고 했다. 좌우에 욕실과 화장실이 있는데 모두 절묘하다. 뜰에는 소철·종려와 여러가지 꽃의 기이한 향기가 빼어나고 깨끗하다. 풀과 같이 가녀린 나무가 있는데 가지는 구성하고 잎은 작으며 꽃은 엶은 자주빛이다. 속칭 고월이라고 한다.』
번의 준비는 숙사에 대한 수리가 끝나면 접대역 리스트가 발표된다.
영빈관에 70명, 학사관에 28명, 상관사에 46명, 중관사에 62명, 하관사에 58명이 배치된다.이밖에 장로숙사에 28명, 퉁역숙사에 47명, 대마번관계자 숙사에 71명이 할당되고 경비소요원 62명, 소방요원 92명등도 지명된다.
1711년에는 경비절감과 국위선양을 앞세워 통신사 접대에 대한 개혁을 이룩했다는 해인데도 오까야마반은 9백4명의 접대요원을 임명하고 선단의 마중과 호송을 위해 1천56척의 민간배를 징발했다.
번에서 얼마나 접대에 신경을 곤두세웠던지 접대를 맡았던 3명이 목숨을 잃었다.
번이 보유하는 배의 수리나 민간어선에 대한 징발이 끝나고 통신사 일행이 대마에 도착했다는 통보가 오면 연락용의 빠른배 25척이 이끼 아이시마 시모노세끼 가미노세끼 가마가리 도모노우라등 항로의, 주요항구에 파견되고 봉화대를 손질한다.
이들 정보망을 통해 통신사 일행의 움직임이 일일이 보고된다.
선단이 아이시마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들어오면 접대요원 전원이 정해진 자리에 배치된다.
가장 가까운 기항지인 도모노우라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1백90척의 배가 히비등 도모노우라에서 우시마도에 이르는 작은 포구나 섬, 연안에 파견되어 대기하고 번의 호송선단 책임자가 8백45척의 대선단올 이끌고 후꾸야마번과의 경계해역까지 마중나가 일행을 인수, 우시마도까지 호위한다. 이때 동원된 선원등의 수는 3천7백7명에 달했다.
우시마도의 지금 인구는 2천6백80가구에 9천2백명이다.
당시의 인구가 얼마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우시마도의 전주민이 접대에 동원되고 배의 징발은 오까야마번영지내의 전어선과 화물선에 미쳤다고 볼수있다.
9월1일 신공일행의 접근을 알리는 봉화가 오르자 선착장에서 영빈관에 이르는 연도의 민가에 창의 덧문을 닫으라는 지시가 하달된다.
도로에는 돗자리를 깔고 1백62개의 등이 밝혀진다.
우시마도에는 몇십년만에 한번있는 장관을 구경하려고 인산인해를 이룬다.
엄한 준수사항이 사전에 공고된다. 1711년 통신사 기항때 관계자및 일반에 공포된 준수사항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일, 사절의 배가 어떠한 장소에 경박하더라도 호송선단의 배가 방해되는 일을 해서는 안되며 땔감이나 식수등에 부자유스러운점이 없도록 할것. 그리고 반드시 경비선이나 구조선을 준비할것.

<모든주민 접대동원|지킬점 사전에공고>
일, 사절이 정박한 장소에 쌀과 어채등을 준비하고 음식에 부패한 것을 써서는 안된다.
일, 정박한 장소에는 화재·지진·폭풍·해일등 비상사태에 대비하고 무례한 태도가 있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숙사는 물론 민가나 절에서도 방심하지 말고 불조심할것.
일, 사절의 숙사나 대마번의 관계자, 혹은 호송선단의 배나 사람이 집결하는 곳에서는 조심하고 싸움질을 하거나 무례한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일, 외국인이 일본의 풍속·습관을 모르고 무례한 일을 하더라도 이를 면박주어서는 안된다. 만약 그런일이 있으면 대마반의관리에게 신고하는것이 좋다.
일, 정박중에 조선인이 몰래 물품의 매매를 요구하더라도 거래를 해서는 안된다. 만일 그런 사실이 후에 판명되면 물품의 다소, 값의 고하를 막론하고 엄벌에 처한다.
일, 사절이 왕래하는 동안에는 구경하는 장소에 남녀가 함께 있어서는 안된다. 반드시 주렴이나 막·병풍등으로 자리를 떼어야한다. 오물을 뿌리거나 술주정·고성등 무례한 짓을 해서는 안된다. 구경꾼은 왕래에 방해가 돼서는 안되며 주렴·막·병풍등 사치품을 얼마든지 써도 좋다.
이 포고문에는 조선통신사를 맞이하는 일본측의 생각이나 자세가 잘 나타나있다.
배가 선착장에 닿으면 난간이 달린 다리가 배에 걸쳐지고 3사가 먼저 내린다. 그리고 안내담당 관원의 선도를 받으며 대마번주의 뒤를 이어 정사·부사·조사관등의 순서로 호화로운 가마를 타고 영빈관으로 향한다.
선착장은 본연사와 영빈관의 중간 바닷가있던 것으로 추정되고있다.
영빈관의 정문 좌우에는 갑옷·투구·철포·장창등으로 장식하고 현관에는 양탄자를 깔았다.
통신사의 일박을 위해 접대 책임을 맡은 봉록 영주들은 오랜 준비와 번의 재력을 쏟아 부었던 것이다.
글 신성순특파원 사진 장남원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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