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67)「광문회」와 「동명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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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육당이 조선광문회를 창설한것은 1910년으로, 그의 나이 21세때. 광문회가 있던 자리는 지금의 을지노 입구에서 삼각동 고가도로 쪽으로 뚫린 삼각동이었다. 육당은 광문회를 창설한 해에 자신의 집을 삼각동으로 이사하면서 신문관도 함께 옮겼다. 그 목조 2층건물은 6·25를 겪고나서 환도후까지도 남아 있었는데 도로를 확장하는 바람에 헐리고 말았다. 그 당시 문화계에서는 이 건물이 신문화운동의 요람이었다는 이유로 보존돼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각설하고, 광문회란 무엇하는 곳인가. 광문회의 광고문을 보면, 『조선 고서를 수집하여 발간하는 곳』이라고 되어있다. 또 광문회규칙 제1조와 제2조는 각각 다음과 같다.
『본회는 조선 구내의 문헌도서중 중대하고 긴요한 자를 수집·편찬·개간하야 귀중한 문서를 부포함을 목적함.』 『본회는 상조의 목적을 달하기 위해 각가의 명저와 내외 비장을 온갖 방법으로 입수하여 가장 단소한 시일에 가장 근소한 대가로 가장 희귀한 도서를 가장 정밀하게 활인 혹은 우인하야 가입하는 회원에게 특렴한 실비를 수하고 정기혹 무정기로 배포함.』
여기에 밝혀 있듯이, 광문회는 회원제의 조선 고서 보급운동단체임을 알수있다. 그런데, 이 광문회의 출판사업은 1915년까지밖에 이어지지 못했으며 그동안의 발행 종수도 23종이라는 실적 밖에 거두지 못했다. 광문회의 창립 당시에 발표한 간행 예정 목록을 보면 2백여종의 각종 고서를 열거하고 있으나 당시의 사회적 환경은 『이 땅의 진면목과 우리의 참 재지가 영원히 감추어지게 되니 큰 죄악이요 큰 비통』이라는 광문회의 열렬한 부르짖음도 제대로 먹혀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 이어서 육당의 제3의 구상은 동명사였다.
육당은 1922년 7월 신문관의 문을 닫고 그 대신 그해 9월에 동명사를 창설하고, 타블로이드판으로 표지·본문 합해서 40면짜리인 시사주간지 『동명』을 발행하였다. 표지는 흑백 단색인데, 「동명」을 상징하듯 수탉 한마리가 홰를 치며 우는 모습이 그려져있다. 매주 1회 일요일발행으로 부당 정가는 15전.
이 주간지는 최남선 감집에 진학문이 주간이었는데, 창간호 2만부가 불과 2, 3일 사이에 매진되는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러나 『동명』은 겨우 23호를 내고 1923년 6월 폐간하고 만다. 그리고는 바로 이어서 7월에 육당은 『시대일보』의 발행허가를 얻어낸다. 이 신문의 진용은 최남선사장에 진학문편집국장. 당시 육당의 나이 34세였다. 「최미투리」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30세 안팎의 육당은 도서·잡지·신문·문고·고서 복간 등 그의 생각과 행동이 합일하여 종횡무진으로 활자매체라면 손대보지 않은게없을 정도였음으로 보아 신문화 또는 과도기 사회의 신흥계층에 끼친 영향은 대단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후 동명사는 육당 자신의 저술인 『조선유람가』 『임진난』 『천만인의 상식』 등을 출판했을뿐 동면상태였었는데,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그해 10월1일 이 회사를 다시 수습·재건하고 육당의 차남 천한웅씨가 그 실무를 맡는다. 최한웅사장은 서울대 의대의 소아과의 사이지만 가업인 동명사를 이끌었고, 현재는 3대 최국왕사장(역시 의사)이 이어받아 경영하고 있다.
동명사는 1949년 이래 종래의 역사물류에서 이공계의 전문서적 출판으로 방향을 바꾸어 착실히 책을 내고있다. <정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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