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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정미조의 ‘쇼쇼쇼’, 총선의 ‘쇼쇼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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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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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
논설위원

‘제가 보고 싶을 땐 두 눈을 꼭 감고~.’ 지난 10일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 잔잔한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가 시작됐다. 37년 만에 무대로 돌아온 가수 정미조(67)씨의 생애 첫 콘서트였다. 이날 첫 노래는 ‘휘파람을 부세요’. 1970년대 군사정권 시절엔 금지곡으로 묶였다. 정확한 사유는 아직도 모른다. 북한 가요 ‘휘파람’을 의식한 게 아니냐는 추론만 있을 뿐이다.

마지막 앙코르곡 ‘불꽃’도 된서리를 맞았다. 사랑에 빠진 젊음을 노래한 경쾌한 곡임에도 노랫말 ‘나는 타오르는 불꽃 한 송이’는 방송을 탈 수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납득이 안 돼요, 납득이”가 절로 터진다. 정씨가 79년 파리로 그림 공부를 떠난 건 이런 시대의 공기와 무관하지 않다.

이날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정씨가 팝송 ‘마이 웨이(My Way)’를 부를 때였다. 72년 4월 TBC(JTBC 전신) 간판 프로그램 ‘쇼쇼쇼’에 처음 출연한 정씨는 이 노래로 벼락스타로 떠올랐다. 10일 노래를 마친 뒤 정씨가 객석에 건넨 말. “울고 웃으며, 여기까지 열심히 왔습니다. 이 길 끝이 어디로 이어져 있을지, 다시 걸어가보겠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가보겠습니다.” 삶의 새로운 문턱에 들어선 노가수의 감회가 뭉클했다.

정씨뿐이랴. 한국인 대부분은 지난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가난과 성장의 갈등 속에서 오늘을 일궈왔다. 어제 총선 날 아침 투표소에 가며 ‘마이 웨이’를 흥얼거렸다. 사흘 전 공연의 흥취도 남아 있었지만 그보다 우리가 만들어갈 ‘아워 웨이’에 대한 한줄기 기대에서다. 정치든 경제든 모든 게 어두컴컴하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헬조선’ ‘흙수저’ 등 우리의 또 다른 얼굴을 고쳐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20대 총선이 ‘루비콘강’을 건넜다. 최악의 국회가 될 거라는 예측도 나왔다. 하지만 한숨을 쉬기엔 이르다. 서로 앞다퉈 국민 앞에 무릎 꿇었던 여야의 절박함이 ‘쇼쇼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호갱’이 아닌 호랑이로서의 유권자를 알았을 터다.

이번에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의 별명 안길동(안철수+홍길동)이 회자했다. 『홍길동전』의 허균이 쓴 ‘호민론’이 떠오른다.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백성이다. 물·불·호랑이보다 더 두려워해야 한다”고 했다. 허균은 사람을 셋으로 나눴다. 윗사람에게 굽실대는 ‘항민(恒民)’, 정치를 원망하는 ‘원민(怨民)’을 넘어 세상 잘못을 바로잡는 ‘호민(豪民)’이다. 선택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자.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