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62)82화 출판의 길 40년(15)출판검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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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일제하의 출판계가 겪어야 했던 수난가운데 가장 큰 것은 역시 출판물의 검열이었다.
일제는 출판할 원고의 사전검열을 출판법에 명시해 놓았다. 때문에 책을 내려면 원고뭉치를 보따리에 싸들고 우선 경기도 경찰부 검열계를 찾아야 했다. 여기에 제출된 원고는 다시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로 넘겨졌다. 도서과에서는 이 원고를 읽은 뒤 출판허가의 여부를 판정했다.
여기에는 조선인 담당관도 몇사람 있었다. 그들 가운데 W씨는 조선 출판인에게 매우 협조적이었으나, 결정권은 일본인 상관에게 달려 있었다.
『때로는 잘봐 달라고 쇠고기 몇근 값을 보내기도 했다.』
『나는 당시 보통학교 5학년에 다닐 땐데, 아버지가 일본말을 전혀 못했기 때문에 검열을 잘 봐달라고 아버지가 선물을 들고 일본인 고궁집을 찾았을때 통역으로 따라간 적이 있다…』
이런 말을 나는 당시 사람들로부터 직접 들었다.
그런데, 이렇듯 치사한 것을 다하여 간신히 출판허가를 받아 나온 책도 시국이 어떻느니, 정세가 어떻느니 이유를 달아서 사제 또는 허가취소·발매금지·압수등 제재를 가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역시 영세하기 이를데 없는 출판사로서는 그 경제적 타격이란 큰 것이었다.
『「유행가」 란 책을 냈는데, 제목에 「유행」 이란 두 글자가 현시국에 부적당하므로 책명을 「가요」로 고치라는 강요를 받았다』
당시 경험자 가운데 한사람의 고백이었다. 이쯤 되면 상당 부분 인쇄를 다시 해야 하므로 당사자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식민지 관리란 자들의생각이 과연 어떠했는가 짐작이간다.
이쯤으로 일제말기의 출판계가 겪었던 어려움을 적는 일을 잠시 멈추고 영창서관으로 말머리를 돌려보자.
영창서관의 창업은 1918년무렵으로 주인은 강의영. 원래 서울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외모가 준수했고 사업가로서의 기질을 타고 났다. 나이 17세때 종로3가에서 고서가게를 시작했다.
사방 벽이 없었기 때문에 겨울이면 토시와 통버선을 껴신고 덜덜 떨면서 장사하는 구멍가게의 주인이 된 것이다.
그 얼마후 서울에서 공진회(일종의 박람회) 가 열렀을 때였다. 시골에서 공진회를 보러 구경꾼들이 몰려들었을때 강씨는 이들을 상대로 국문으로 편지쓰는법을 정리한『가정척판』 을 출판하여 팔았는데, 이것이 크게 히트했다. 그 무렴 책의 정가를 보면 제작 원가에 비해 마진이 큰편이었다.
이 책 외에 영창서관의 노다지는 보통학교용 『개범대전료』 의 국어및 산수과 참고서로서, 당시 낙양의 지가를 올려놓았다.
이상은 강씨의 생질이며 영창서관의 지배인이던 신태삼씨의 회고담이다.
강씨는 애우개 (지금의 아현동근방) 에서 유기그릇 장사를 크게하는 사람의 신임을 얻었고, 후일 그의 사위가 되면서 장인의 가르침으로 강원도 철원지방의논밭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당은해마다 늘어나갔다.
그는 맨손으로 성가하여 당대의 부자소리를 듣게되었다. 2차대전이 일어나 미국 선교재단이 철수하자 이화여고는 재정난에 빠진다. 이때 강씨는 철원에 사두었던 논발 5천섬지기 땀을 쾌척하고 이화의 지주가 된다.
그후 영창서관은 해방과 6·25의 격변속에서 그 2대는 수성을 못하고 문을 닫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는 또하나의 예를 남긴 것이다. 정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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