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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260>|<제82화> 출반의 길40년|일제말책방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고서점이 많기로 유명했던 관훈동 골목에서 1941년부터 일성당을 인수하여 서점을 경영했던 황종수씨의 탁월한 기억력에 힘입어 일제말기의 책방거리를, 다만 책방의 상호와 주인의이름만이라도 여기 소개할수 있게 됐다.
황종수씨는 함남 인동학교교장직을 사임하고 출판업이야말로 교육사업이나 다를바 없다는 생각에서 책방을 시작한 사람이다.
그는 오늘날까지도 우리 출판계에서는 신사로 통한다.
그는 자신이 서점을 경영하고 있을 무렵의 동업자들 명단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관훈동에는 동광당 (이정내) 삼중당 (서재수) 김항당(현통문관·이겸노)일성당(황종수) 일심당(황의석) 문우당 (이세열)연구서림 (유병조) 문예서림(김평욱) 삼성당 (고봉수)동양당(서기석)금문당 (이봉구)한남서림(전형필) 등이 있었고, 적선동에는 유길서점 (신재영) 중앙인서관(우현기), 종로에 나와서는 박문·영창·덕흥·세창(신태삼)·동문 (윤시중) 등 5개사가 있었다고 한다.
남대문로1가에는 우리나라 최고 노포인 회동서관과 금성서점(이회백) 이, 안국동으로 올라가서는 한의서전문의 행림서원(이태호)남국서원(김익환), 그리고 인사동의 문광서림 (홍돈민) 과 경운동의 광동서림 (김영완) 이 있었다.
원남동으로 와서는 금생당(맹린술)이, 연건동에는 문창서관(김영일)신흥당 (유기영) 이 있었다.
당시 신흥주택가로 이름난 혜화동에는 명문당 (이종만) 과 대륙당(홍정기)이 있었고, 충정로에는 대경당(박백중)삼영당 (윤종호)남송당 (박씨) , 신문로에는성문당 (박성산) 이 있었다.
서울 변두리 지역에도 책방은있었다.
신설동의 응봉서점(노씨), 한강로의 개문사 (차일윤) , 용문동의 대중서점 (전병학) 등이 그들이다.
이밖에 일본인 주거지인 충무로·을지로·용산·초동등지에는 일서를 취급하는 서점이6, 7개소 있었다.
내 기억을 더듬어 보면, 종로의4, 5개 점포와 견지동·안국동·관훈동의 2, 3개 점포를 제외한 나머지 서점은 헌책이나 고서화를 취급하는 4,5평 미만의 보잘것 없는 책방들이 대부분이었다.
또 종로에 있는 신간을 취급하는 서점들도 책만 팔아서는 경영 수지를 맞추기 어려운 형편 이어서 문방구나 학생용 운동구를 함께 취급하였다.
종로라는 지리적 잇점으로 동양·박문·덕흥·회동등 네 서점은 학용품 취급 외에 초·중등교과서 지정 판매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중 동양서림을 제외한 세서점은 해방후까지도 비교적 오랜사력을 유지할수 있었던 것이다.
고서점 가운데에도 두가지 유형이 있었다.
중학생이나 전문대학생들의 학습용 헌책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곳과, 관훈동의 한남서림·문광서림·광동서국과같이 조선 재래의 목관·고서적을 취급하는 곳 등이었다.
한남서림의 창업자 백두용은 서울 화원 집안에서 자란 학식있고 풍채좋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서점에서 거래되는 고서들이 일본인의 수중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서울의 갑부 전형필 (간송미술관 창설자)은 이 한남서림을 거액인 1만5천원에 사들여 직접 경영하면서 가치있는 우리의 전적문화재, 특히 많은 희귀문헌을 수집했다는 장한 일화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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