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9)초창기 서점들-제82화 출판의 길40년(1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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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회동서관이 개업한데 이어 서울에는 8, 9군데의 책방이 생겼다.
김기현의 대동서시(총로) ,김상만의 광학서포(관철동 부근), 주한영의 중앙서관(종로3가), 지송욱의 신구서림(봉래동), 노익형의 박문서관(남대문로3가), 이성호의 대한서림 (안국동 종로경찰서건너편) 등이며, 미문학교 재단 설립자인 민대직이 경영한 휘문관과보성학교 재단 설립자인 이용익이 경영한 보성관이라는 이색적인 서점도 있었다 (이상 고유상옹의 회고) .
이 두 서점은 당시 자기학교의 학생들에게 가르칠 교과서와 참고서의 출판및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오늘날의 대학출판 부겸 구내서점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학교출판부의 활동은 한일합방으로 말미암아 중단되고 말았다.
이서구씨의 『책방세시기』(1968년 『신동아』 5월호) 에 의하면 고옹이 들고 있는 9개 책방 외에도 다음 21개의 책방을 더 들고 있다.
즉 백두용의 한남서림(관훈)동), 현병주·현공염 2인 경영의 대창서관(견지동), 김재희의 신명서림(종로), 강의영의 영창서관(종로), 안태영의 광덕관(종로3가), 김동진의 덕흥서림 (종로), 현 억의전학서관 (관철동 부근) ,김인규의고금서해관(종로), 이종정의 광동서국 (견지동), 하익홍의 안현서관 (안국동), 유태진의 광한서림(인사동) ,최창한의 광화서관 (적선동), 민대호의 동양서원 (종로2가), 이흥균서사 (인사동), 야소교서사 (하나는 인사동, 하나는 남대문로3가 부근), 그리고 임자를 알수 없는 수문관, 황화서재, 유일서관, 보급서관, 보구서관, 옥호서림 등이다.
고옹의 기억과 이서구씨의 기록을 합치면 서점은 모두 30개소에 이른다.
고옹이 기억하고 있는 시기는 한일합방을 전후한 무렵이고, 이씨의 기록은 그로부터 약 10년이 경과한 시기인 것으로 짐작된다.
그뒤 서점의 분포는 어떤 양상을 띠어갔는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1939년에 발간된 『경성변남』에서 출판업·서적상 명단을 보면 앞서 든 30개소의 명단에 나타나지 않은 새로운 이름들이 등장한다.
조선도서, 한성도서, 이문당, 동광당, 창문당, 활문사 (방학과제장전문), 대영성서공회, 문우당, 문광서림, 문화서림등 l0개소가 그들이다.
그밖에 중국서 전문점인 박기홍서점과 일서 중심인 대판옥, 일한서방, 삼서점, 광송당, 동경당등이 있었다.
특이한 형태로는 당시의 모든 출판물을 망라하여 선전하고 통신판매를 시도했던 시문학회라는사업체가 있었다.
이상에서 말한바 3단계로 변모되어 온 서점 분포를 대조해 보면 새로 생긴 서점수와 소멸된 서점수는 대체로 비슷하다는 그간의 사정을 알수 있다.
즉 우리의 근대서점사 30년동안에 약10년을 간격으로 하여 20여서점이 소명되었다는 사정을 파악해 볼수 있는 것이다.
국한문을 표기했던 한말 전후의출판물이 구문표기의 출판물로 바뀌면서 서점 매상에 타격을 주었던 것을 알수 있다.
고유한 민족문화의 계승과 학문의 자유, 논평의 자유가 박탈되었고 우리의 출판물에 대한 판금과 압수가 자행되었으며, 그에이어 저 일문 표기 출판물의 거센 파도에 밀러 부침하면서 서점은 그 판도를 서서히 바꾸어갔다.
나는 식민지 하늘에서 별똥별처럼 사라져간 서점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다시금 꼽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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