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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머런의 굴욕 … 영국 총리 295년 만에 첫 납세실적 공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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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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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머런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2009년 이후 납세 실적을 공개했다. 1721년 시작된 영국 총리제 역사상 최초다. 그는 “내 탓”이라며 공개 사과도 했다. 그 사이 지지율은 추락했다. 지난주 사상 최대의 조세 회피 스캔들이 폭로된 ‘파나마 페이퍼스’에서 선친이 조세회피처인 바하마에 투자펀드 ‘블레어모어 홀딩스’를 설립한 사실이 공개된 이후 벌어진 일 때문이다.

선친‘조세회피’5일간 네 차례 해명
역풍 되레 커지자 “내 탓” 공식 사과
언론 “재정 공개 선례 … 역사적 순간”
코빈 노동당 대표도 “곧 공개할 것”

캐머런 총리는 9일 보수당 춘계 회의에서 “썩 운이 좋은 한 주는 아니었다”며 “(이번 이슈를) 더 잘 다뤘어야 했고 더 잘 다룰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총리실이나 보좌진을 비난하지 말고 나를 비난하라”고 말했다. 영국 언론들은 “그 어느 때보다 잘못을 뉘우치는 기색”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실제 그는 지난 주 이번 이슈가 불거졌을 때 찔끔찔끔 해명하며 문제를 키웠다. 처음엔 총리실에서 ‘개인 문제’라고 치부했다. 그러나 역풍이 불자 총리가 직접 나서 “나에겐 주식이 없다. 역외 펀드도 없다”고 해명했다. 부인과 자녀들 명의도 없다는 부연도 했다.

이후 선친의 재산 대부분이 모친에게 상속됐다는 점에서 “미래에라도 혜택 받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자 “미래에도 그럴 일 없다”고 했다. 그리곤 다시 직접 방송에 출연해 “1997년 선친이 소유했던 블레어모어의 역외 트러스트 1만2000파운드(1950만원) 샀다가 총리가 되기 전인 2010년 3만 파운드에 팔았고 영국 세금을 냈다”고 실토했다. 5일간에 걸쳐 네 번 해명하는 ‘공보 재난’이었다.

그 사이 영국 언론들은 그의 얘기를 헤드라인으로 다뤘다. 지지율은 곤두박질쳐서 2013년 8월 이래 최저치인 36%(유고브)가 됐다. 영국에선 “총리 인기도 하락으로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가 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까지 나온다. 캐머런 총리가 반 브렉시트 운동을 이끌고 있어서다.

그가 공개 사과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그는 그러나 선친이 탈세 목적으로 역외 펀드를 세웠다는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 그는 “환율 통제가 시작된 이후 달러화 표시 주식에 투자를 원하는 개인들과 기업들을 위해 설립된 것이며 당시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펀드들이 수천 개”라며 “아버지가 비난받는 게 마음 아프다”고 했다.

그는 이날 납세 기록도 공개했다. 2009년부터 6년간 107만8008파운드(17억5463만원)에 대해 40만2283파운드를 세금으로 냈다. 실효세율은 37%였다. 이중 런던 집 임대 수입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제스처가 불길을 잡을 것 같지 않다. 모친으로부터 2011년 두 차례에 걸쳐 10만 파운드씩 받은 사실이 드러나서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32만5000파운드 증여까지는 세금을 물지 않는 걸 이용한 게 편법 증여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총리실은 “선친으로부터 캐머런 총리가 상속받은 건 30만 파운드인데 (집을 물려받은 다른 장남보다) 적게 받았다고 여긴 모친이 증여한 것”이라며 “여동생 두 명에게도 같은 액수를 줬다”고 설명했다. 영국 BBC 방송은 “이러지 않곤 이슈를 돌파할 수 없다는 판단”이라며 “그러나 캐머런 총리의 부가 그에겐 약점이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영국은 우리와 달리 총선 때 출마자들의 납세 실적을 공개하는 전통이 없다. 그러나 이번 일로 변화가 생길 것으로 보인다. 당장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가 “서류가 준비 되는대로 공개하겠다”고 말했다. 조지 오스본 재무 장관도 유사한 압박을 받고 있다. 영국의 더타임스는 “정당 대표들은 자신들의 재정에 대해 공개해야 하는 선례를 남겼다”며 “역사적 순간”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가운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13일 프랑스 파리에서 각국 세무 당국자들을 소집해 긴급 회의를 연다. 각국의 과세 제도의 문제점과 탈세 등 불법 행위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할 예정이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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