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50m 이어진 화폭 … 백두대간 사계를 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1면

기사 이미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둘레길에 전시된 작품 ‘강산여화’는 의자 ‘자리’가 곳곳에 설치됐다. 문봉선 작가가 기대서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사진 정재숙 기자]

눈이 시원하다. 가슴이 툭 터진다. 발이 절로 나간다. 여기가 산속인지 도심인지 헛갈린다. 물소리에 새 지저귐이 귀를 간질이는 장쾌한 그림 앞에서 관람객은 몸이 먼저 반응하는 독특한 체험에 놀란다. 폭 1m, 길이 150m에 달하는 초대형 그림 ‘강산여화(江山如畵)’가 펼쳐진 서울 을지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배움터 둘레길은 백두대간의 사계로 순간 이동한다.

문봉선 수묵화 ‘강산여화’ 전시
DDP 둘레길 곳곳 의자 놓아
옛 선비처럼 누워서 감상도

이 전무후무한 대작을 그린 이는 동양화가 문봉선(55) 홍익대 미대 교수다. “삼천리금수강산을 온전히 나의 두 발로 걷고자 했다”는 화가의 열망이 화폭 곳곳에서 피어오른다. 백두산 천지에서 지리산까지 1625㎞ 산줄기를 3년에 걸쳐 올랐고, 그 현장 사생을 붙들고 화실에서 2년 넘게 씨름했다. 우리 산이 소나무와 잡목의 낮은 토산인지라 물기 없는 거친 붓으로 화선지에 비비듯이 그리는 ‘초묵법(焦墨法)’을 고안했다. 터럭의 긴 올을 쳐내고 그루터기만 남겨놓은 거친 몽당붓을 연장 삼아 수천수만 번 붓질을 쌓고 또 쌓아 이 땅과 사람들을 불러냈다. 누구에게나 ‘한 폭의 그림 같은 인생’이기를 기원하며 소동파의 ‘적벽회고’의 한 구절을 따 ‘강산여화’라는 제목을 붙였다.

섬진강에서 시작해 경사로를 따라 이어지는 200여 개 산의 봉우리들은 다가왔다 물러섰다 솟았다 숨었다, 산하의 교향악을 이룬다. 그래서 소설가 김훈 씨는 문봉선 화가의 산수화를 ‘강산여율(江山如律)’이라 했다. “나는 문봉선의 거대한 화폭 앞에서 강산이 시간 속으로 내보내는 음악을 생각한다.”

곳곳에 놓인 가구 디자이너 하지훈 씨의 의자 ‘자리’에 누워 작품을 감상할 수도 있다. 옛 선비들이 사랑방에 그림을 걸어놓고 유람 기분을 냈다는 ‘와유(臥遊)’의 경지다.

유화 캔버스라면 이런 곡면에 150㎏이 넘는 장폭의 그림을 붙일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화선지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배첩장인 정찬정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가 꼬박 스무 시간을 붙들고 씨름해 백두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국토의 흐름을 원형 그대로 살려놓았다. 마지막 그림에 이어지는 글은 아쉬움으로 끝난다. ‘갈 수도 그릴 수도 없는 북한의 백두대간. 훗날 내 아들이나 후학 중 누군가가 미완의 백두대간을 연결시켜 주었으면 하는 바람.’ 문봉선 화백은 “전통회화의 가치는 무엇이고 그 계승 방법은 없는가를 이 전시로 묻고 싶다”고 말했다.

문봉선 작가와 이야기 나누는 ‘아티스트 토크’가 20일, 5월 4일과 18일 오후 7시 전시장에서 열린다. 전시는 5월 29일까지. 관람료 4000원. 02-2153-0046.

글=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