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예식장으로 붐비는 하관(시모노세끼) 옛 영빈관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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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대륙으로 통하는 문호 시모노세끼(하관·당시적간관)아 닿았다. 하늘엔 새털구름 몇점만 떠있을뿐 쾌청한 날씨. 관문해협의 풍광이 더욱 빛을 발한다. 해협의 허공을 가로질러 시모노세끼와 기따규우슈(북구주)를 잇는 관문교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높이 1백34m, 길이 1천68m, 6차선의 거대한 다리. 크고 작은배들이 분주히 오간다.
다리의 바로 북쪽해변이 단노우라(단지포)의 옛 싸움터다. 1185년 원씨와 평씨가 자웅을 겨뤄 원씨가 이겼다.
『예부터 이 관문해협을 제압하는 자가 서일본의 패자가 될만큼 요충지였지요』
동행한 이진희교수는 이곳 장주의 사람들이 조선이나 중국의 움직임에 민감했던것은 관문해협을 끼고있다는 지리적 특수사정때문이었을 것이라고했다.

<선진문화 받아들인 해상주요길목 관문>
관문해협은 야요이(미생)시대부터 한반도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이는 해상의 길목이었다.
고대부터 몇차례의 집단 도래가 있었고 제철·토목·관개수리·건축등 선진기술과 문자·율령제도·불교등 고대문화의 골격이 이들 도래인의 손을 통해 이 해협을 거쳐 들어갔다.
통신사 일행 또한 다음 기항지인 시모노세끼로 향한다. 마중 나온 장주번의 안내선 3척이 선도하고 복강번의 경호선 1백여척이 호위한다. 선단이 지도를 지나 한참 나갔을때 돌연 강한 동풍을 만났다. 이 지점에선 가끔 일어나는 이변이다. 부득이 바람을 피해 지도에 배를 댈수 밖에 없었다.
지도는 겨우 수십호의 한촌. 숙박시설이 있을리 없다. 정사·부사·종사관등 모두 삼사만 서광사에 들고 나머지는 모두 배에서 2일간을 머물지 않을수 없었다. 복강번에선 여기까지 와서 접대를 해야 하니 그 어려움이 여간 아니었다.
통신사 일행이 복강번을 통과하는데 17일이 걸렸으니 하루하루가 한 번의 재력을 쏟아부를 만큼 접대비를 써며 심신을 깎아야하는 나날이었다.
통신사 선단이 지도를 떠나 우측으로 소창성을 바라볼 무렵, 소창번의 선단이 마중나와 복강번 경호선단과 교대한다.
통신사을 영접하는 소창번의 임무는 여기서부터 시모노세끼 어귀의 선도(암류도)까지의 해상경비와 예인. 그밖에 동해도 왕복에 필요한 말을 제공하고 도로 일부를 관리하는 것이었으나 접대의무를 띤 복강번·장주번에 비하면 그경제적 부담은 아주 가벼웠다.
소창을 지나 「10여리」. 선도에 가까와오니 장주번의 영호선단이 마중나온다. 번의 출영관리선, 수로안내지휘선, 경호선과 예인선(1백20척)등 대 선단이다.
장주번의 할 일은 통신사 일행을 선도에서 시모노세끼를 거쳐 가미노세끼(상관)까지 호행하는 것. 이를 위해 준비한 배는 6백10척, 인원 2천9백명이 넘었다. 시모노세끼·가미노세끼에서의 접대요원까지 합치면 5천명이 넘는 대부대.

<곤불 분리령에 따라 적간신궁으로 개칭>
관문번의 바로 남쪽해안에 마치 용궁같이 울긋불긋 칠한 한무리의 건물들이 얼른 눈에띈다.
정면에 우뚝 솟은 수천문을 들어서면 긴 회랑이 둘러싸고 있다. 사방으로 퍼지는 가구라(신락)의 음율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요즈음 결혼식장으로 호황을 누린다는 이곳 적간신궁은 원래 아미타사라는 절이 있던 자리다.
아미타사는 규모가 큰 절이었다. 통신사의 신유한공 일행은 아미타사 경내에 신축한 영빈관에서 묵었다.
『사관 건물은 새로 지었는데 상도의것에 비해 약간 협소하기는 하나 정묘 하기는 훨씬 더하다. 사관의 북쪽에 장려한 아미타사가 있다. 그옆에 안덕천황의 사당이 있다. 사당은 매우 협소한데 소상을 모셔놓았다』(해유녹)
무로마찌(실정)시대의 영빈관도 여기에 있었다.
15세기 중엽 신숙주나 도꾸가와 막부와의 국교회복교섭차 왔던 유정(송운대사)등도 여기에 묵었으며 에도(강호)시대 11차례의 통신사들도 모두 여기서 묵고 갔다.
지금 아미타사는 없다. 명치유신후 신불분리령에 따라 절을 부수고 천황(안덕제)을 모시는 사당을 개축, ,「천황사」라했다. 그후 곧 「적간궁」이라 개칭하고 다시 「안덕천황어능」으로지정, 대대적으로 개수한 후 1940년 적간신궁으로 고쳐 불렀다.
『군국주의와 함께 비대해진 적간신궁도 태평양전쟁 말기 공습으로 불타버리고 다시 지은 것이지요.』
이교수의 말이다.

<한수 배우던 명륜관 침략의 주역을 배출>
시모노세끼에선 장주번의 학자들이 조선학자들과의 화려한 시문의 수창을 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신공은 실망한듯 『더불어 수창한 문인도 또한 많았으나 족히 이야기할만한 자가 없다』고 기록하고있다.
장주번의 번교인 명륜관에선 이런 수참성과를 빠짐없이 정리해 출판했다. 이는 장주번의 일관된방침이었다. 『장문무신문계』『장문계신문계』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전환은 자심한것.
『이 명륜관에서 배운 이등박문·사내정의·증양황조등이 「명치」에 와선 조선에의 침략과 식민지지배를 추진하는 주역이 됐지요.』 이교수가 역사의 반전에 대해얘기했다.
18세기 후반에 들어오면 새로운 그룹, 즉 일본의 국학자들 사이에 『일본서기』적 우월사관이 대두한다. 그들은 통신사 외교방식을 반대한다. 명치유신후 사태는 급변, 이를 주도한 그들은 조선아 대한 대항의식을 크게 강화한다. 19세기말 이 대항의식은 「정한」의 사상과 행동으로 전환하며 금세기초 양국의 불행한관계를 일방적으로 강요한다.
이점에서 선린시대이후의 시모노세끼는 재일한국인에게 잊을 수 없는 한의 도시. 노일전쟁 직후인 1905년9월,부산-시모노세끼간을 연결하는 「관부연락선」이 개통한 이래 수백만에 이르는 망국민들을 일본으로 실어날랐다. 또 국책이란 이름으로 1천만 가까운 일본의 젊은이들을 대륙으로 내몰기도 했다. 이제 지난 70년 다시 개통된 「부관페리」는 수학여행 학생들, 보따리장수아주머니들과 신혼부부들을 태우고 부지런히 오가고 있다.
문득 관문해협을 바라보니 짐을 가득실은 육중한 한국적 컨테이너 한척이 삽상한 봄바람을 가르며 관문교밑을 통과하고 있었다.
글 이근성기자 사진 최재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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