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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직업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직업병이라면 흔히 규폐증이나 잠수병, 또는 중금속중독에따른 여러가지 증상을 떠올리겠지만 작가에게도 나름의 직업병이 있다.
운동부족에서 오는 비만증, 중독이라해도 좋을만큼 일반적으로 지나친 음주벽같은것 외에도 반복되는 표현양식에서 몸에 밴 언어상의부주의 또한 병적인 현상이라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작가가 염두에 두는것은 언제나 독자라는 불특정 다수다.
따라서 이때에는 특별한 문학적 효과를 의해서가 아니면 존칭이나 경어는 별로 의미가없다.
죄스럽게도 어머니가 『어린 자식 다섯과 빈곤의 50년대를 헤쳐가야 했던 홀어미』로되고, 근엄한 대종손도 『종가의 늙은 주인』 이 돼버리는 식이다.
하지만 그것을 당하는 쪽으로 봐서는 여간 괘씸하고 분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그 글이 논픽션의 성격을 띠었을 경우에는 단순한 직업상의 실수나 불경을 넘어 고의적인 모욕이나 도전으로까지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작년의 일이다.
어떤 잡지사의 요청으로 고향 탐방기사를 썼는데 거기서 나는 또 ,소설을 쓸 때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우리에게는 가장 가까운 집안어른 한분을 『그집의 늙은주인』으로 표현하고 어릴적부터 가까이 지내던 집안아저씨는 『서울에 사는 아들』로 써버린 것이다.
뿐만아니라 내 위로 9대를 산 옛집에 돌아왔다는 나름의 감회에 젖어 그분들이 그 집을 산 과정에 무슨크게 부당한 일이나 있었던 것처럼 독자들이 느껴지게했다.
나는 기억에 거의 없어 어머님께 들은대로 쓴것인데, 원래 아끼던 물건이란 제값을 받고팔아도 헐값에 내준듯한 느낌이 들게 마련이란 것을 감안하지 않은 탓이었다.
워낙 가까운 집안간의 일이라 내 해명과 사과로 그 글은 없었던것 처럼 되었지만 어쨌든그 일은 내 직업병을 다시한번 돌아보게 해주었다.
작가가 인물을 창조한다고는 해도 대개 그 원형은 주위에서 얻게 마련이다.
특히 자전적일때가 더 그러한데, 괴로운 것은 소설이 아름답고 착한사람들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때악역을 맡게된 원형은 용케도 작중인물과 자신의 동일성을 알아보고 작가에게 항의하는 수가 있다.
지금까지는 픽션의 개념에 의지해 가볍게 받아넘겼으나, 드디어 내스스로도 픽션과 논픽션을 혼동하게 돼버리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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