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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등소평」…경제개혁기수|고르바초프…그는 누구인가|서구스타일의 외교수완탁월|「안드로포프」정권 때 개혁실현에 선규장 역할|지식층·젊은층서 큰 인기 얻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스탈린」집권기인 1931년에 태어난「고르바초프」는 2차대전 종전당시 14세로 실질적인 전후세대.「브레즈네프」에 의해 발탁되어 경제정책을 중심으로 한「안드로포프」의 개혁의지를 실현하는데 앞장서온 그는 정치국원가운데 유일하게 모스크바대학을 나온 엘리트이자 최연소로 볼셰비키혁명(1917변)이후 태어난 젊은 지도자들의 기수였다.
「안드로포프」사후「체르넨코」와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나기는 했으나「고르바초프」의 당내 위치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소련의 등소평」「공산당 제2서기장」등으로 불려온 그가 「체르넨코」치하에서 갖고있던 공시직함은 공산당정치국 정위원겸 당중앙위 이데올로기 담당서기. 그리고 소련방 최고회의 간부회의 외교위원장.
이 가운데 그의 위치를 뚜렷하게 부각시켜준 것은 이데올로기 담당서기라는 직책이다.
소련공산당에서는 전통적으로 이 직책을 가졌던 인물이 후계자의 자리를 차지해왔던 것이다.
「브레즈네프」집권 당시「안드로포프」,「안드로포프」가 서기장이던 시절에는「체르넨코」가 바로 이 직책을 갖고 있었다.
서방의 소련관측통들이「고르바초프」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한것은 83년4월22일「레닌」탄생기념일 행사 때였다.
그는 당시 병석에 누워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던「안드로포프」대신연설을 함으로써 후계자 물망에 올랐던 것.
한달뒤 그는 소련방최고회의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캐나다를 방문, 의회초청 연설등을 통해 세련된 감각의 새로운 정치인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이것이 그의 서방세계 데뷔였다.
작년들어「체르넨코」가 건강문제로 은퇴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 때마다 그도 함께 뉴스의 초점에 올랐다.
「안드로포프」전서기장과 함께 지난해 12월 사망한 국방상 「우스티노프」의 지지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진 그는 한때 강경파 정치국원「그리고리·로마노프」와도 후계자경쟁을 벌여온 것으로 알려졌으나「우스티노프」사망당시 영국을 방문중이던 그가 모스크바에 앞서 사망사실을 발표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기도 했다.「체르넨코」가 건강악화로 시들어가는 시기에 해외 나들이를 한「고르바초프」를 두고 서방관측통들은「소련식 망태자수업」이라고 그의 당권승계가 가까왔음을 점치기도 했다.
소련의 지도자들 가운데서는 이례적으로 서방세계여행을 자주한 그는 영국방문때도 매우세련되고 부드러운 태도를 보임으로써 서방정치가들의 호감을 샀다.
크렘린지도자로서는 매우 드물게 부인을 동반한 것은 물론양복과 넥타이등도 서구스타일에 가까왔고 방문장소에서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거나 웃음띈 표정을 자주나타내 그가 날카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우 유연한 인물임을 나타냈다.
당시「대처」영국수상은『「고르바초프」같은 인물이라면 일을 함께 해나갈수 있을것』 이라고 극찬하기까지 했다.
83년5월 소련최고회의대표단을 이끌고 캐나다를 공식방문했을 때 경험이 풍부한「트튀도」당시 수상도 그의 외교적 수완에 놀라움을 표시, 『「고르바초프」는 상상 이상으로 유연하고 유능한 인상을 주였다』고 평했다.
유엔사무차장으로 있다가 78년 미국에 망명한 소련외교관「아르카디·셰프첸코」또한「고르바초프」를 매우 호의적으로 평가, 『지적이며 훌륭한 교육을 받아 매너가 좋다』고 말한적이 있다.
소련국민들에게도 그는 매우 강인하고 정열이 넘치는 이미지를 보여 TV등에 가끔 나타나 연설을 할때면 말을 더듬거리고 몸을 떠는「체르넨코」와 대조적으로 경중을 휘어갑는 능력도 있다.
이런 여러가지 강점으로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지식층과 젊은층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있는「젊은세대의 기수」로 일찌기 부각된바 있다.
「고르바초프」가 중앙정치무대로 발돋움 하는데 발판이 됐던 그의 고향 스타프로폴 지방은 코카서스 산맥의 북쪽 구릉으로 소련 유수의 곡창이자 국방의 요충.
그는 이곳에서 콤바인 하베스터를 운전하며 5년가까이 농장일도 했고, 모스크바대에서 법학을, 그리고 농업연구소에서 농업정책을 연구했다. 그후 그는「체르넨코」가 그랬던 것처럼이 지방의 청년공산당연맹에 가입하여 지방당 제1서기의 자리까지 올랐으며 그의 뛰어난 능력으로 쉽게 중앙당 서기로 발탁될 수 있었다.
그의 출세가도는 마치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빨라 80년 49세의 나이로 최연소 정치국원이 됐다.
그의 이례적인 승진의 배경에는「브레즈네프」시절의 실력가이자 볼셰비키혁명이후 당 최고 이론가인「수술로프」의 지원이 큰힘이 됐던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안드로포프」사후 「체르넨코」가 대권을 이어받은 것은 급격한 세대교체를 두려워한 소련공산당원로급들의 배려에 의한 과도기적인 것일뿐「고르바초프」의 등장은 이때부터 실질적으로 이루어져가고 있었던 것이라고 서방 소식통들은 분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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