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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응답받지 못하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73호 22면

일러스트 김옥

시끄러운 카페에서 일을 하다가, 문득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귀에 감기듯 들려왔다. 원고 쓰기를 멈추고 들어보니 갑자기 휘말리게 된 복잡한 삼각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마감이 코앞이었지만 내 옆에 앉은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귀를 뗄 수가 없었다. 막장 드라마를 극히 혐오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사람이라도, 우연히 흘려듣게 되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엔 빠져들지 않을 도리가 없다. 우리는 종종 실제 ‘좋아하는 것’과 ‘좋아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미끄러진다. 그것이 누군가의 뒷담화거나 삼각관계에 관한 이야기라면 더더욱.


영화 ‘하트비트’는 한눈에 반한 남자 니콜라(그는 한눈에 봐도 그리스의 다비드상과 똑같게 생겼다)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두 친구 마리와 프랑시스(그는 게이다)의 열렬한 질투극이다. 둘도 없는 친구였던 마리와 프랑시스의 우정이 한 남자를 향한 짝사랑 때문에 어떻게 변질되는지 보는 게 이 영화의 백미인 것이다. 물론 영화를 만들고 직접 프랑시스를 연기한 자비에 돌란 감독(그는 최근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예로 아델의 곡 ‘헬로’의 뮤직비디오 연출을 맡았다!)의 위트 있는 편집과 농담을 보고 듣는 재미도 크다. 하지만 가장 흥미로운 건 이 영화가 가진 독특한 프레임이다. 한 남자를 두 여자도 아닌, 한 남자와 또 다른 여자가 좋아하는(그것도 오랜 친구 사이!), 이토록 이상한 삼각관계 말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숫자 3이 유난히 많이 나온다. 천하의 바람둥이인 주인공 토마스에 의하면 숫자 3은 여자를 사귀는 그만의 법칙이다. 여자를 짧게 만날 생각이면 세 번 이상 만나지 말고, 오래 사귈 생각이라면 3주 간격을 두고 만나야 한다는 일종의 연애 지침 말이다.


은희경의 소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의 주인공 진희 역시 숫자 3을 예찬한다. 기존의 연애관을 전복시키는 자유연애주의자 진희에게 숫자 3은 트리비얼(trivial), 즉 사소함을 의미한다. 숫자 3은 종종 기독교의 ‘믿음, 소망, 사랑’, 변증법의 ‘정, 반, 합’ 등 완벽함을 상징한다. 왈츠의 우아한 3박자는 또 어떤가. 하나보다는 둘, 둘 보다는 셋에서 우리는 더 큰 안정과 균형을 느낀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완벽을 상징하는 숫자 3이 연애와 짝사랑에 대입되면, 상상하기 힘든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짝사랑은 선한 인간이 선택하는 자학『애인의 애인에게』라는 소설에서 나는 사람들이 짝사랑에 대해 가지는 일종의 편견에 대해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사람들은 짝사랑이 한 사람을 혼자서 좋아하는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결과 없이 허망하게 사라져버린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다. 짝사랑은 ‘너는 누구인가’라는 진지한 질문이지만 그것은 스스로를 혼란스럽게 만들지 않는다.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그렇다면 나는 누구여야 하는가!’라는 잘못된 질문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소요되는 혼란이 이 적요로운 사랑 앞에선 어느덧 무의미해진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기 때문에 나 이외의 누구도 상처받지 않을 것이란 점에서 짝사랑은 선한 인간들이 선택하는 자학이며 자책이니까.”


하지만 이것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혼자서 사랑하는 일에 해당된다. 즉 두 사람의 시선이 한 남자를 향해 강력히 멈춰서 있다면, 제 아무리 감정을 숨기기 위해 혼신을 다하는 짝사랑이라고 해도 이야기가 뒤집히거나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 두 사람이 제 아무리 오랜 우정을 간직한 친구라고 해도 사랑 앞에서 우정은 점점 더 퇴색해간다.


‘하트비트’는 우디 앨런의 몇몇 영화들처럼 짝사랑했거나, 일방적인 사랑을 받았던 사람들의 인터뷰 장면이 곳곳에 삽입되었다. 가령 자신이 보낸 이메일을 짝사랑하는 상대방이 확인했는지 엿보기 위해 끊임없이 컴퓨터를 새로 고침하던 여자의 고백이 영화에 나오는 것이다. 여자는 꽤 시니컬한 얼굴로 “새로 고침 할 때마다 누군가가 죽으면 세상에 나 혼자 남겠지?”라고 푸념한다. 영화에는 사귀던 남자 애인이 갑자기 여자를 좋아하는 바람에 폭발한 게이도 등장한다.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니콜라가 절대 자기 스타일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 바쁘게 꽃단장하는 마리와 프랑시스의 얼굴은 생기로 가득 차 있다. 니콜라가 오드리 헵번을 좋아한다고 말하자마자, 그녀의 포스터를 사서 그가 사는 동네의 카페에 죽치고 앉아 우연을 가장해 만나는 아이 같은 행동은 어떤가. ‘하트비트’는 가장 강력한 러브 사인으로, 상대에게 전혀 관심 없는 척하며 상대의 관심을 끌기 위해 두 친구가 벌이는 다양하고도 민망한 행동들을 감각적으로 편집했다.


삼각관계에서 사랑 잃고 우정을 회복하지만 니콜라의 제안으로 셋이 함께 떠난 휴가지에서 결국 두 친구는 니콜라를 차지하기 위해 대놓고 머리를 쥐어뜯고, 난투극을 벌이며, 감정을 드러낸다. 니콜라는 그 과정을 지켜보다가, 결국 이들에게서 완전히 마음을 돌린다.


유혹의 본질은 철저한 무관심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상대를 유혹하는 일이 가장 손쉬운 것이다. 니콜라를 향한 두 사람의 미칠 듯한 욕망이 그를 유혹하는 가장 큰 방해 요소로 작동해 결국 관계를 파멸시켰다. 유혹에 있어 상대를 향한 무관심은(적어도 무관심한 척 하는 것!) 절대 옵션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 ‘덤 앤 더머’처럼 한 순간 ‘사랑의 찐따들’로 전락한 두 친구 프랑시스와 마리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깊은 연민을 느꼈다. 니콜라에게 보낸 정성스런 편지를 거부당하고, 전화조차 받지 않는 니콜라를 바라보며 절망하는 그들의 얼굴 속에는 실연당한 사람 특유의 절망감이 가득하다. 하지만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는 법이다. 사랑에 빛과 그림자가 동시에 존재하듯이.


인간은 고통과 슬픔으로 쉽게 연대한다. 결혼이나 섹스처럼 누군가와 함께해야 행복해지는 어려움에 비하면, 누군가의 슬픔을 함께 나누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한 남자와 삼각관계에 휘말렸던 두 친구는 결국 사랑을 잃자 우정을 회복한다. 아니, 그들의 우정은 진화된다. 한 남자를 ‘동시에’ 미워하는 쪽으로 말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프랑시스와 마리는 우연히 파티에 나타난 니콜라와 마주친다. 하지만 프랑시스는 반가운 얼굴로 안부를 묻는 니콜라의 면전에 대고 “우웩!”하며 토하는 과장된 제스처를 취한다. 마리는 그런 프랑시스를 격려하듯 꼭 안아준다. 열렬히 욕망하던 사람은 거울처럼 자신을 비추며 스스로를 순식간에 하등한 인간으로 만든다. 상대방의 매력이 빛날수록 나 자신은 초라하고 비루하게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두 친구가 니콜라를 보는 순간 느꼈을 감정도 그런 것이었으리라. 응답받지 못한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생기는 자기 모멸감과 자기 비하는 그 어떤 고통보다 크기에. ●


백영옥 ??광고쟁이, 서점직원, 기자를 거쳐 지금은 작가. 소설『스타일』『다이어트의 여왕』『아주 보통의 연애』 , 인터뷰집 『다른 남자』 ,산문집『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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