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기고 싶은이야기들(4241)〉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74)|민세의 청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1928년 5월 민세는 『제남사건의 피상관』이란 제목의 사설을 썼는데 이 사설에서 민세는 일본의 다나까내각이 중국 산동에 출병을 감행한 것은 무력으로 중국을 침략하려는 명백한 전초적 행동이라고 신랄하게 비난한 것으로 총독부 당국을 놀라게 하였다. 총독부에서는 즉시 민세를 구속하여 8개월 금고형을 선고하고 5개월동안의 장기에 걸치는 신문정간 처분을 내렸다. 이것은 일찌기 없던 가혹한 처벌이었다.
그뒤 민세는 신석우·최선익의 퇴진으로 신문경영이 곤란해지자 스스로 사장에 취임하여 얼마 안되는 자기 소유의 전답까지 팔아서 들여놓았으나 경영곤란은 여전하였다. 1932년에는 사장 안재홍과 영업국장 이승번이 재만동포의 구호금을 유용하였다는 혐의로 수감되었고 그 뒤로 신문경영이 방응모의 손에 넘어갔다.
민세는 그 뒤에 기고가로 붓을 들어 1935년 조선일보에 「민세필담」을 연재하였다.
우리나라의 역사·문화·자연·민족성에 대하여 역사적 사례를 들어 민족의 혼을 깨우치는데 힘쓴 웅혼한 글이었다.
1936년에는 상해에 있는 박찬익에게 밀서를 보내 중국의 항주군관학교에 조선청년을 밀파하여 군사훈련을 시키게 하자고 한 것이 탄로되어 치안유지법에 걸려 2년징역의 선고를 받았다. 이 때 그는 항소로 보석중에 조선상고사감 하권을 집필하였다. 그는 이 책의 권두에 『국사를 편찬함으로써 민족정기를 영원히 남겨 두는 것이 지고한 사명임을 스스로 깨닫고 이에 국사의 연구에 전념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상고사감은 단재 신채호의 학풍을 계승하고 동시에 사회경제사학을 개척하려고 한 주목할 저서라고 한다.
그는 이즈음 틈을 타 고적의 답사를 즐겼는데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전후해 우리들은 강제로 동원되어 부여신궁인지 무엇을 짓는데 근로보국대로 갔었다. 그 때 우연히 민세가 신사복에 이상한 전투모를 쓰고 각반을 치고 부여의 5층탑을 구경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들은 민세와 점심을 같이 하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였는데 서울 보호관찰소에 왔다가는 길이라고 하며 어쩌면 많은 사람이 구속될 지 모른다고 하였다.
이 때로 말하면 사상범은 아무때나 구속할 수 있는 암혹시대여서 보호관찰에 걸려 있는 사람은, 목숨이 언제 어떻게 넘어갈지 모르는 판이었다. 민세는 이승만계통의 흥업구락부사건 등 여러 차례 사상범으로 감옥에 드나들어 보호관찰의 대상이 되었으므로 살얼음판에 살고 있는 셈이었다.
이 무렵 민세의 청절에 대해 민세와 오랫동안 신문사에서 같이 지내온 원로언론인 김을한은 이렇게 그때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일제말기에 자기는 동경에 있었는데 서울에서 들려오는 소문에 만주에서 귀순해 온 이종영(해방후 국회의원)이란 사람이 중간에 들어 총독부의 팔목 보안과장이 자주 민세와 만난다는 말을 듣고, 그 때는 총독부에서 깨끗한 명사에게 시국강연을 시켜 청년들을 전쟁에 협력하도록 하려고 졸라대는 판이라 민세의 청절마저 더러워질까하여 염려했었다.
서울에 돌아오는 길로 민세를 만났는데 민세 말이 총독부 당국자와 자주 만나는 것은 사실이나 덮어놓고 협력을 거부할 수도 없으므로 시국강연은 하되 조선민족을 인정해주면 하겠소 라고 하였더니 내선일체와 동근동조를 내세우던 그들인지라 결국「민족」을 인정하지 못하여 다행히 시국강연을 하지 않아도 좋게 모면하였다고 하였다.
이렇게 민세는 끝끝내 청절을 지켜왔으므로 민중의 숭앙이 대단하였고, 드디어 해방이 되자 건국준비회의 큰 일을 맡게 된 것이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