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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질병」이 가장큰골치였다|한해 13만명 죽기도 정조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조선시대에서 정치 또는 사회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문제는 역질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였으며 이 분야에 대한 정책 비중도 가장 높았던것으로 나타났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허정교수와 대구한의대 변정환교수가 조사 분석한 「조선시대의 역병에 관련된 질병관과 구료시책에 관한 연구」 에 따르면 질병으로 인한 인명피해가 인구감소의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는것.
이조실록에 따르면 정조23년 (1799년) 에 전국적으로 12만8천명이 병으로 사망한 것을 비롯하여 영조19년 (1743년)에는 6만∼7만명, 영조26년(1750년) 에는 9월에만 6만7천8백9명이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숙종 25년 (1699년)의 호구조사에서 전국인구는 5백77만2천3백명으로 6년전에 비해 1백41만6천2백74명이나 줄어들었는데 그 대부분이 기근과 전염병 때문이였다는것.
이같은 질병은 태조에서 경술합방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으로 발생해 역대제왕의 가장 큰 관심사였으며 보건정책도 초기의 경신내지 미신적인데서 점차 합리적이고 준과학적인 면으로 옮겨왔다는 분석이다.
조선시대 의서에 나타난 당시의 병인론은 기상이변으로 인한 절기불화설, 천지의 음양 부조화에서 오는 오운륙기설, 하천이나 하수구가 막히면 질병이 생긴다는 환경불결설, 억울하게 죽은자의 원혼이나 관리의 포악으로 맺힌 원기때문이라는 원혼을발설, 제사를 받아먹지 못하는 잡귀들이 일으킨다는 잡귀소행설, 감옥이나 묘소·과거장·묘사등에 모여 기거나 음식을 함께 하기 때문이라는 군집원인설등으로 표현되었다. 이중 일부는 오늘날의 과학으로도 가능성이 입증되는 것들이다.
또 무병을 비는 제사인 노제에서 문종이나 중종등은 병이란 기근과 한서또는 인간 스스로가 만든 재앙(자작지얼)이라며 질병의 원인을 종래의 귀신설에서 인간적인 것으로 끌어내리고 있다. 『절 하나 헐고 나무 하나 베었다고 그것이 병의 빌미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부에서 폈던 구료시책은▲악병의 원인은 배고픔과 추위와 피로 (남자환자가 많기때문) 이니 사전에구호한다. ▲향약을 쓰도록 하며 민간요법을 숙지시켜 자가치료를 돕는다.▲병이 극심한 곳은 고을을 옮기거나 환자를 외딴섬에 격리시킨다.▲전국온천지역에 요양시설을 설치, 운영한다.▲피해자에게는 환곡·잡역·조세등을 감면한다. 우리말로 된 각종 벽온서를 간행, 반포하여 일반에게 의료지식을 보급한다.▲응제를 실시하며 경우에 따라 불교의식인 수륙재도 시행한다는 등의 방침을 세워 대처했다.
또 질병이 발생하면 전의감에서는 구료관을 차출해 파견했고 활인서에서는 약물지급,환자수의 파악과 보고등의 업무를 맡았다.
성종때에는 질병의 치료율읕 높이기 위해 의원들에게 치료경쟁을 시켜 성적에 따라 상벌을 주는제도도 있었으며 점차 예방적 의료·복지시책이 확대되어갔다.
그러나 이러한 복지시책이 불충분하고 제한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백성들은 여러가지 속방에 매달릴수밖에 없었다.
예로 「5월 초닷새에 쑥으로 사람모양을 만들어 문위에 두면 병을 막는다」「6월에는 항로나 읍지에 흐르는 샘물을 먹지 말라. 먹으면 학질을 얻는다」 「동지에 얼음이 얼지 않으면 전염병이 성행한다」 등 세시예방법이 유행했다.
「항상 새벽 닭이 울때 마음을 깨끗이 하여 사해신의 이름을 세번씩 외면 온갖 귀신과 질병과 화재를 물리친다」 「전염은 환자가 있는 집에서 악기가 번져나가기 때문이며 향유를 코에 바르거나 종이를 꼬아 콧속을 더듬어 재채기를 내면 좋다」 「환자가있는 집에 들어갈 때는 행동을 조심하고 왼쪽으로 들어가라」 는 등의 갖가지 전염병을 물리치는 벽온법이 성행했다.
여하간 현대와 같은 질병분류법이 없었던 때라 이조실록에 구체적인 병명이 나오지는 않지만 영양부족과 불결한 환경에 따른 각종 전염병이 이조시대의 주요질병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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