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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 3만 달러 논란이 공허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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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10년째 '국민소득 3만 달러'의 벽을 넘지 못했다. 25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전년 대비 2.4% 감소한 2만7340달러로 집계됐다. 달러 표시 GNI가 줄어든 것은 2009년 이후 6년 만이다.

1인당 GNI엔 기업·정부 소득도 포함돼
순수한 가계 몫은 절반 조금 넘는 수준
수출 대기업에 편중된 성장 전략 탓
가계부채 증가와 내수 침체 악순환

한국은행은 "원화 기준으론 4.6% 늘었지만 달러 대비 원화가치가 7.4% 하락해 달러로 표시된 국민소득이 감소했다"고 설명했다. 미국이 기준금리를 올린 것은 지난해 12월이지만 달러화는 연중 내내 강세를 보였다.

1인당 GNI가 2만 달러를 처음 돌파한 것은 2006년이다. 당시만 해도 "5~6년이면 3만 달러 시대에 진입할 것"이란 낙관론이 팽배했다. 연 5% 안팎의 비교적 높은 경제성장률이 유지됐고, 원화가치가 꾸준히 상승세를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GNI는 국내총생산(GDP)를 국민 수로 나눠 계산된다. 성장률이 높아지면 분자에 해당하는 GDP가 커져 1인당 소득이 증가한다. 원화가치가 높아지면 달러로 표시되는 GNI를 끌어올리는 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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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3만 달러 달성 시점을 "빨라야 2018년"으로 보는 견해가 대다수다. GNI를 결정하는 가장 큰 변수인 성장률 전망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어서다.

한국경제의 성장률은 이명박 정부 때부터 낮아지기 시작해 박근혜 정부 들어서 3% 전후로 굳어졌다. 올해도 3%선을 내다보는 정부의 기대와 달리 지난해와 비슷한 2.6% 안팎을 기록할 것이란 관측이 많다. 잠재성장률 역시 2%대 중반에서 3% 초반까지로 낮아졌다. 저출산·고령화로 경제활동인구와 생산인구가 줄어들고 기업 부문의 혁신도 부진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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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이 더뎌지는 건 분명히 문제다. 하지만 이에 못지 않은 문제가 있다. 국민들의 체감도다. 지난해 원화표시 1인당 GNI는 3093만5000원이다. 4인 가족 기준으로 계산하면 연 소득이 1억2000만원을 훌쩍 넘는다. 하지만 이런 가계는 현실에서 극소수다.

가계의 순소득을 보다 잘 반영하는 지표는 1인당 가계총처분가능소득(PGDI)이다. 1인당 GNI에서 세금과 연금 등 강제적으로 지출하는 금액을 뺀 수치다. 1인당 PGDI는 지난해 1756만5000원으로, 1인당 GNI의 56.8%에 불과했다. 미국(73.9%)·독일(62.5%)·영국(65.1%)· 일본(62.6%) 등 주요국보다 상당히 낮다.

하지만 이것도 대다수 국민들의 체감을 넘어선다. 1인당 GNI가 기업과 정부의 소득까지 포함한 수치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빼야 가계의 상황을 보다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경제성장의 과실이 가계로 돌아가지 않는 경향은 날로 뚜렷해지고 있다. OECD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근로소득과 자본소득, 이전소득을 포함한 가계소득이 전체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하락하는 속도에서 한국이 오스트리아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1995년 69.6%에서 2014년 64.3%로 5.3%포인트 떨어졌다. 이 기간 중 한국의 1인당 GDP는 연평균 3.8% 증가했지만 1인당 가계소득은 2.1% 늘어나는 데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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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몫이 쪼그라든 원인으론 수출 주도형 성장 전략이 가장 많이 지적된다. 가계소득 증가율은 1990년대 연 평균 11.8%에서 2000년 이후 5.7%로 반토막이 났다. 상대적으로 기업소득 증가율은 같은 기간 중 연 13.3%에서 9.8%씩 소폭 감소했다.

수출이 늘어나도 일자리나 임금 상승으로 연결되지 않는 '고용 없는 성장'도 뚜렷해졌다. 수출 주력업종이 조선·철강·자동차·반도체 등 자본 및 설비 집중형 산업으로 구성된 데다 2000년대 이후 이들 기업이 국내보다 해외생산을 크게 늘린 영향이다.

정부의 거시정책도 이를 뒷받침했다.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마다 정부는 원화가치를 떨어뜨려 수출을 늘리는 '고환율 정책'을 사용했다. 직간접적으로 수출을 부양하는 진흥정책도 다양하게 동원했다. "아랫목을 데우면 나중에 윗목도 따뜻해진다"는 '낙수효과'를 이론적 근거로 댔다.

이들 정책이 단기적으로 성장률 등 경제지표를 호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 수출과 내수, 기업과 가계,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고착시켰다는 비판도 적지 않게 제기되고 있다.

분명한 건 이런 방식의 성장전략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세계 교역 둔화는 수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한국 경제의 토대를 흔들고 있다. 중후장대 산업으로 구성된 주력산업은 중국을 비롯한 후발주자들에게 빠른 속도로 따라잡히고 있다. 그렇다고 미국처럼 새로운 성장산업을 일구고 있는 것도 아니다. 고부가 서비스산업 육성을 외치고 있는 것도 불가피한 선택이다.

하지만 가계소득이 늘지 않으면 모두 공염불이다. 일자리가 늘지 않고 월급이 오르지 않는데 지갑을 열 가계는 없다. 1100조원이 넘는 가계부채와 불안한 노후도 발목을 잡고 있다. 어느 것 할 것 없이 버거운 과제지내수와 로 연결돼 있기까지 하다. 문제를 푸는 해법도 수출과 대기업정책을 포함한 국가의 성장전략부터 재고해야한다는 의미다. 국민이 있어야 국가가 있듯이, 가계가 살아야 국가경제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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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이 밝힌 지난해 노동소득분배율은 62.9%다. 2014년보다 0.1%포인트 상승했다. 노동소득분배율은 국내총생산(GDP) 총액에서 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을 말한다. 수치만 보면 경제성장의 과실이 국민들에게 골고루 배분되는 정도가 조금이나마 나아졌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야를 1997년 외환위기 이후로 넓혀봐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노동소득분배율은 60%를 중심으로 크게 변화하기 않았기 때문이다. 90년대 중반까지 꾸준히 상승하던 노동소득분배율은 외환위기 이후 50%대 후반으로 후퇴했다가 노무현 정부 후기 60%대에 올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60%선을 위협받다가 다시 62% 안팎을 오르내리고 있다.

국민들의 상식이나 체감과는 영 다른 결과다.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대기업의 이익이 해마다 사상최대를 기록한 반면 근로자들의 임금은 상대적으로 정체됐다는 인식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온 걸까. 전문가들은 "자영업자의 소득을 영업이익으로 계산해 자본소득에 포함시키는 방식 탓에 현실이 잘 반영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자영업자는 자신의 돈을 투자하고 일도 한다. 이들이 번 돈은 자본소득과 노동소득의 성격을 모두 갖고 있다. 그런데 한은은 자영업자의 소득을 자본소득으로 통계를 잡는다. 이로 인한 왜곡을 보정하면 1990년대 이후 노동소득분배율이 10%포인트 이상 감소했다는 게 진보진영 학자들의 분석이다.

재계와 보수진영의 시각은 다르다. 이들은 주요 선진국과 산업국가에서 10년 전 급속한 노동소득분배율 악화가 나타났지만 한국은 큰 차이가 없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한은 통계를 그대로 인정하고, 외국에 비해 한국의 가계몫이 크게 줄지 않았다는 얘기다.

또 노동소득분배율 악화는 전 세계적인 추세라는 점을 지적한다. 주요 기업이 중국과 동남아 등으로 옮긴 공장은 국내 일자리나 임금 상승과 무관하지만 GDP 계산에는 포함된다. 국내에서의 분배가 실제로 악화되지 않아도 노동소득분배율은 낮아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기계화나 자동화가 진전되는 것도 노동소득분배율을 낮추는 불가피한 추세라고 한다.

양측의 주장엔 모두 일리가 있다. '알파고 논란'에서 드러났듯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현상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은 저임금과 낮은 세율을 찾아 전세계를 돌아다닌다. 이런 추세를 막기는 어렵다.

하지만 경제는 소비자가 있어야 돌아간다. 이들의 다수는 임금으로 쓸 돈을 번다. 소비자가 없는 공장은 멈출 수 밖에 없다. 노동과 소비가 분리될 수 있는지, 노동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지 등의 명제는 이제 철학의 영역 뿐 아니라 현실 경제의 고민으로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