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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2)단제 신채호-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65)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식이 시작되자 사회자는 도산이 오늘 이 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시골에서 올라 왔다는 이야기를 하고 간단한 축사를 하게되었다고 소개하였다.
도산은 조용히 일어나서 그 자리에서 낮은 소리로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분명한 알기 쉬운 말로 이야기를 계속해나가는데 차츰 음성이 커지고 열이 가해지는 듯 싶었다.
이것이 30년 전인 1908년께 평양에 있는 인성학교에서, 또는 청년학우회의 간부들을 이끌고 전국방방곡곡에서 애국의 열변을 토해 민중의 열광적인 환호와 갈채를 받아오던 그 열변 이로구나 하고 우리들은 자못 황홀해서 듣고있었다. 도산의 음성이 점차로 피치를 올려서 가경에 들어가려고 할 때 별안간 말석에 앉았던 일경삼윤이 『주우시(중지)!』하고 기성을 발하였다. 그 순간 도산은 이야기를 뚝 그치고 흥분을 누르는 듯 잠시 서 있더니 천천히 자리에 도로 앉았다. 청중들은 별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닌데 중지시킨 삼윤의태도에 분개하는 빛이었으나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그 때는 일경이 간교해져 연사가 위험한 이야기를 해 버린 뒤에 연설을 중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연사가 말을 돌려 가는 투가 위험한 일로 결론지을듯하면 미리 그 위험한말이 나오기 전에 중지시켜버리는 것이었다.
삼윤이란자는 우리말을 귀신같이 잘 알아듣기 때문에 도산의 말 돌리는 눈치를 미리 알아차리고 앞질러 중지시킨 것이었다.
이것이 내가 도산의 풍모에 접하고 그의 웅변을 들은 최초이자 최후의 경험이었다.
도산이 별세한 뒤 태평양전쟁 중 우리들은 근로보국대로 징발되어 평양부근의 흑령탄광에서 1주일을 지낸 일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강서의. 고분속에 있는 유명한 고가전 벽화를 구경하러 갔었다. 찬란한 벽화 구경을 하고 오는 길에 안내하는 사람이 길을 송태산장 쪽으로 인도하였다. 강서는 도산의 고향이고 대전각목에서 나온 뒤에 거기에 집을 짓고 얼마동안 거처한 일이 있었는데 그집을 송태산장이라고 불렀다. 안내하는 사람이 멀리 보이는 기와집을 가리키면서 저것이 송태산장인데, 일경이 지금도 지키고 있어 사람이 얼씬 을 못하니 여기서 멀리 바라만 보고 가라고 하고 자기는 그 쪽을 향해 모자를 벗고 경례를 하였다.
강서사람들이 그렇게 위하던 송태산장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상이 도산의 이야기이고 이보다 2년 전인 1936년 3월 단제 신채호가 여순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신문에는 나중에 조그맣게 나 아는 사람만 알았지만, 그의 미망인 박씨는 그때 파고다공원 서쪽 담 뒤에 있는 골목 속에서 산파의 간판을 내걸고 그것으로 연명해가고 있었다.
이 무렵 조선일보에 가끔 신채호의 역사논문이 실렸는데 민세 안재홍의 배려로 이 논문에 대한 약간의 원고료를 박씨 부인에게 전해 생활비에 보태 쓰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단재 신채호로 말하면 말할 것도 없이 뛰어난 사학자·언론인·독립운동가로서 1880년 청주에서 출생하여 13세 때 이미 신동으로 알려졌고, 20세에 상경하여 성균관박사가 되었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 될 당시 황성신문에서 구국의 필봉을 휘둘렀고, 합방이 되자 해외로 망명하여 시베리아·상해 등지에서 활동하였는데 1929년 일경에 체포되어 10년 징역의 선고를 받고 복역 중 1936년 여순 감옥에서 사망한 것이다. 한국 사람의 정신적인 자주성을 주장한 그의 사학은 「단재 사학」이라고 일컬어져 독특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주요저서 로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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