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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공들인 멸치국물로 푸아그라 환상의 맛 내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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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0호 12면

1 훈제장어를 넣은 푸아그라 테린 위에 얇게 썬 콜라비와 모과 퓨레·송어 알을 곁들인 요리.

프랑스 제3의 도시인 리옹의 레스토랑 르 파스탕(Le Passe Temps)에 들어서면 한국인 종업원이 자리를 안내한다. 90㎡(약 30평) 남짓한 레스토랑 내 26개의 좌석 대부분을 프랑스 현지인들이 차지하고 있지만 계산대 너머 주방에서 프랑스 요리를 만드는 요리사 3명 모두 한국인이다.


세계적인 레스토랑 평가서로 꼽히는 ‘미슐랭(미쉐린) 가이드’는 지난 2월 1일, 르 파스탕에 별 하나(원 스타)를 부여했다. 레스토랑 등급에 따라 최고 별 3개까지 부여하는 미슐랭 가이드가 별 3개를 부여한 레스토랑이 프랑스 전체에서 26개에 불과해서 별 하나만 받아도 현지에서 ‘요리가 훌륭한 집’이란 평가를 받는다.


이 레스토랑을 이끄는 이영훈(32) 오너 셰프가 한국인 최초로 프랑스 요리 부문에서 별 하나의 평가를 받은 것이다. 이에 앞서 한국인으로서는 2012년 퓨전 한식요리로 임정식 셰프가 처음으로 별 하나를 받아 화제에 오른 바 있지만 한국인 셰프가 만든 프랑스 요리가 이런 평가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프랑스 한인 동포 2세도 아닌,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고 군대도 다녀온 그런 한국인이, 그것도 미슐랭 가이드의 본고장에서 프랑스 요리로 별을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만드는 프랑스 요리의 수준을 인정받았다는 의미다.


미식가들이 많아 맛 평가가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까다롭다고 소문난 프랑스에서 이 셰프는 어떻게 식당을 낸 지 2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이렇게 인정받을 수 있었던 걸까. 지난2월 중순 리옹 현지에서 이 셰프를 만나 한국인 최초로 미슐랭 별을 따낸 비결과 그의 음식 철학을 들어봤다.

이영훈 오너 셰프가 2014년 프랑스 리옹에 문을 연 프랑스 레스토랑 ‘라 파스탕’ 입구. [이선민 기자]

레스토랑 개점 2년 만에 이룬 쾌거 미슐랭 스타 셰프가 된 이씨는 경기도 평택 출신으로 한국관광대 조리과를 나와 서울 이태원 등지의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3년 동안 일해 오다 2009년 더 심오한 맛을 찾기 위해 프랑스 유학을 결심했다.


전통적인 프랑스 조리법을 교육하는 리옹의 요리학교 폴 보퀴즈에서 2년여 동안 공부해 오던 그는 현지에서 프랑스 요리로 승부를 걸기로 결심하고 2014년 레스토랑을 차렸다. 프랑스 음식이지만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며 현지인의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메뉴를 선보인 끝에 맛이 좋다는 입소문을 타게 됐고, 지난해 미슐랭 관계자가 식당을 직접 방문해 실사를 거쳐 요리 실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됐다.


-미슐랭은 암행 평가를 하기로 유명하다. 실제로 어떻게 평가하는가. “평가단이 곧 올 거라고 사전에 귀띔을 받아 알고 있었다. 지난해 초 식사를 마친 한 손님이 자신을 미슐랭 직원이라고 소개했다. 평가할 만한 레스토랑을 미리 선정하는 사람이었다. 별을 받든 못 받든 2016년 가이드 북에 우리 식당이 소개될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다리에 힘이 탁 풀렸다. ‘우리 레스토랑이 미슐랭의 별을 받는다니…’ 말이 안 되는 거였다. 우리 식당을 찾아왔던 손님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가 봤던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들은 우리처럼 이렇게 초라하진 않았다. 그는 9∼12월 사이에 평가단이 올테니 지금처럼만 하라고 했다.”


-그래서 평가단이 언제 왔나. “언제 왔다 갔는지 모른다. 발표 사흘 전 전화가 왔다. ‘당신 레스토랑이 원 스타를 받았다’고 프랑스어로 얘기하더라. 내가 프랑스말을 잘 못해 헛것을 듣는 줄 알았다. 그동안 너무 고생해 별을 받게 되면 눈물을 펑펑 쏟을 거라고 항상 말했는데 막상 눈물보다 온몸이 떨리는 게 먼저 오더라.”


-별을 받은 비결이 있다면. “현지인들이 내 요리에서 미세한 차이를 느끼는 것 같다. 프랑스 사람이 한 것 같지 않지만 프랑스적인 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한때 메뉴에 아예 한식을 섞어 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내가 잘하는 것을 만들어야지 왜 남과 비슷하게 만드나 하는 생각에 그만뒀다.”


-별을 받은 뒤 주변 반응은 어땠나. “주변 원 스타 레스토랑 셰프들이 모두 찾아와 축하해 줬다. ‘앞으로 별 2개를 받으려 노력하는 것보다 받은 별 하나를 잘 지킬 수 있는 게 중요하다’고 하더라. 한국 사람들이라면 “열심히 해 얼른 별 2개를 받아야지’라고 했을 텐데.”

2 인기 메뉴인 푸아그라 시그니처 요리.

3 호주산 와규스테이크에 겨울 뿌리 야채 퓨레로 마무리한 요리. [사진 르 파스탕]

정확한 간을 맞추는 데서 시작 현지에서 본 레스토랑 내부 인테리어는 간단했다. 원목 식탁과 검정 의자가 가지런하다. 흰색과 회색으로 깔끔한 벽에 그림 몇 점과 천장에 매달린 검정 스티로폼 장식 정도가 전부다. 단출한 이 레스토랑을 느낌 있게 만드는 건 식탁에 올려진 향기 가득한 음식들이었다.


메뉴를 보니 모두 프랑스 정식 코스 요리다. 미슐랭 스타를 받은 뒤부터 예약이 몰려 이제는 2∼3주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자리 잡기가 어렵다. 한국인이 만드는 프랑스 요리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한국인 손님도 꽤 늘었다고 한다. 그의 요리는 전반적으로 모양도 맛도 모두 편안한 느낌이다. 이 셰프는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간은 ‘짜다’ ‘싱겁다’의 차원을 떠나 ‘맛이 완벽하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간을 맞추는 데 엄청난 공을 들인다”고 설명했다.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푸아그라였다. 팬에 구운 푸아그라 위에 무·김가루 등이 가니시로 곁들여져 제공되는 애피타이저다. 여기에 멸치육수를 따라 준다. 이 셰프가 “국물 하나로 프랑스를 제패하겠다”며 1년여 동안 준비해 개발해 낸 회심의 재료다. 육수가 그릇에 차오를수록 김가루가 퍼져 나가고, 진한 바다 내음이 몰려온다. 한 숟가락 떠먹으니 바로 잔치국수의 그 맛이 떠오른다. 굳이 한식처럼 만들진 않았지만 자극적이지 않은 현지 재료를 써서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뤄 낸 이 요리는 한국인에게는 익숙한 맛으로, 프랑스인에게는 조금 더 진하고 새로운 맛으로 평가받는다. 처음에는 아뮤즈 부슈(전채요리 전 제공되는 한입거리)로만 준비됐지만 이제는 어엿한 정식 메뉴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메뉴는 어떻게 정하나. “한 달에 한 번씩 바꾼다. 한국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먹고 소문을 낸 메뉴를 보고 찾아온다지만 프랑스인들은 다르다. 우리 집 손님들은 메뉴가 자주 바뀌는 것을 좋아한다. ‘바뀌는 때가 언제냐. 그 이후로 예약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식재료는 어디서 구하나. “처음엔 주변에 미슐랭 별을 받은 레스토랑을 찾아가 식사를 한 뒤 셰프에게 맘에 드는 고기나 생선 재료를 어디서 샀는지 꼬치꼬치 물어봤다. 그곳을 찾아가 누구누구 셰프가 보내 왔다고 말하면 깜짝 놀란다. ‘별 있는 레스토랑과 거래하고 있는데 그 셰프를 아는 걸 봐선 이 동양인이 대충 요리하는 사람이 아니구나’ 했나 보다. 이렇게 하나씩 뚫었다. 이젠 다르다. 뭘 하나라도 잘못 보내면 ‘여기서 식사 안 해 봤느냐, 어떻게 이런 걸 보내느냐’고 따질 수 있다.”


-레스토랑을 내기가 쉽진 않았을 텐데. “일본인이나 다른 외국인들이 하는 레스토랑 음식 맛을 보고서 ‘이 정도로도 손님이 꽉 차는데 내가 한다면 더 잘되겠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지금까지 한국 사람이 프랑스에서 레스토랑을 낸 적이 없었으니까 더 잘하고 싶었다. 일단 사업계획서를 만들고 나서 은행이란 은행은 다 찾아다녔다. 천신만고 끝에 한 은행에서 자금을 빌릴 수 있었다. 당시엔 비자도 없는 외국인이라 힘들었다. 돈이 넉넉지 않았기에 아내와 함께 인테리어 공사도 직접 해야 했다. 고작 600만원으로 재료만 구입했다. 음식과 레스토랑 분위기는 서로 맞아야 한다는 게 내 철학이었다. 공간이 비었다고 아무거나 사서 채울 순 없었다. 출퇴근길에 거리의 소품점을 뒤져 가며 지금 걸려 있는 장식들을 찾아냈다.”

이영훈 셰프. [박상문 기자]

연이은 낙방 끝에 들어선 요리사의 길 이제는 전 세계 셰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미슐랭 스타 셰프가 됐지만 시작은 늦었다. 대입 재수를 했는데도 원하던 건축과를 연거푸 낙방하게 되자 방황을 거듭했다. 그런 그에게 요리의 길을 권한 건 부모님이었다. 우연히 들어선 요리의 세계에서 흥미를 하나둘 느끼게 됐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공부를 못했으니까 이제 뭘 하든 일등이라는 걸 한번 해 보자”고 마음먹게 됐다는 것이다.


-목표가 있었다면. “레스토랑을 차린 이상 미슐랭 스타를 받고 싶었다. 일본 요리사들이 프랑스 요리로 별을 많이 받았는데 한국 사람도 이제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생각했던 것보단 3~4년 빨리 받았다. 레스토랑 문을 연 직후엔 동양인이 하루 종일 있으니 ‘중식당이냐’ ‘스시집이냐’ 묻는 사람이 많았다. 프랑스 식당이라고 하면 오히려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손님이 한 명도 없는 날도 많았다. 점차 맛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손님이 늘기 시작했다.”


-직원이 전부 한국인이다. “더 많은 한국 견습생이 일하고 배울 수 있는 공간을 주고 싶었다. 여기서 1년 정도 일한 뒤에는 다른 곳에 가서 ‘전 잘 못하니까 100만원만 줘도 일하겠습니다’가 아니라 ‘전 300만원을 안 주면 일 못합니다’고 했으면 한다. ‘웬 배짱이냐, 어디 한번 일해 봐라’ 하게끔 말이다. 나는 우리 직원들에게 이런 모습을 원한다. 앞으로 밖에서 당당하게 대우받을 수 있을 만큼 요구하고 그 정도의 위치에 오르길 바란다.”


-앞으로의 계획은. “올여름께 분위기를 바꿔 보기 위해 레스토랑 내부 공사를 할 예정이다. 메뉴도 많은 변화를 보일 것이다. 더 큰 미래를 본다면 파리나 서울에 내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을 내고 싶다. 후배 양성을 위해 프랑스와 서울 간에 셰프 교류도 많이 시키고 싶다.”


미슐랭(미쉐린) 가이드 1900년 프랑스 타이어 회사인 미쉐린이 운전자를 위해 발간한 여행 안내서가 시초. 1933년부터 레스토랑 평가를 추가해 현재의 별 1~3개 시스템이 도입됐다.?


리옹=이선민 코리아중앙데일리 기자?summer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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