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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알베르토의 문화탐구생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 사람, 김기덕 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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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토의 문화탐구생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 사람, 김기덕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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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한국영화를 접한 건 2005년 대학생 때의 일이다. 그때 나는 베네치아대 동아시아학과에서 중어중문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이탈리아에서 아시아 문화는 낯설었다. 일어일문학은 어느 정도 인기가 있었지만 중어중문학 전공자는 드물었고, 한국어학과는 아예 없었다. 한국과 관련된 수업은 빈첸차 두르소 교수님이 혼자 가르치는 한국어 교양 수업이 유일했다. 한국학 전문가인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한국의 매력을 알려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는데, 그 방법 중 하나가 수업 시간에 한국영화·드라마를 틀어주는 거였다. 이 수업이 재미있다고 입소문이 나면서, 한국영화를 상영하는 날이면 강의실은 호기심에 찬 학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비기 시작했다. 나도 그런 학생 중 하나였다.

나의 첫 번째 한국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제2외국어로 한국어를 선택하고, 수업에 들어간 날 처음 한국영화를 보게 되었다. 평소 판타지 장르보다 현실적인 영화를 좋아하던 나는 제목이 유난히 길고 서정적인 그 영화를 솔직히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가 느릿느릿 진행되는 사이 어느새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영화가 바로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영어 제목 Spring Summer Fall Winter and Spring, 2003)이다.

고요한 호수에 떠 있는 작은 암자의 풍경이 더없이 우아했다. 이탈리아의 강한 햇살, 선명한 신록과 달리 명상에 잠긴 듯 은은한 자연의 색감이 매력적이었다. 동자승이 동물을 괴롭히며 놀자, 나이 든 스승이 바로 야단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본 후에야 짧고 굵게 가르침을 주는 대목도 기억에 남는다. 많은 대사 없이 멀찍이 떨어져 조용하게 인생의 흐름을 관조하는 듯한 느낌이었달까. 영화의 촬영지가 경상북도 주왕산 자락의 저수지 ‘주산지’라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아직 한국에 대해 잘 몰랐던 때다. 서구인에게 너무도 이국적인, 한국영화의 색다른 스타일에 반했던 건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쨌든,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느리고 강렬하게 남긴 인상 덕분일까. 한국은 내게 꼭 가 보고 싶은 나라가 됐다.

이후 한국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봉준호·이준익·박찬욱·홍상수 감독의 영화도 이탈리아 자막을 찾아가며 즐겨 보게 됐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최근작까지 빠짐없이 챙겨 봤다.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그가 2006년 연출한 ‘시간’이다. 이 영화는 성형수술이라는 소재를 통해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와 동시에 우리의 얼굴과 영혼은 연결돼 있는 게 아닐까, 얼굴이 바뀌면 삶에 대한 태도도 바뀌는 걸까 하는 재미난 생각거리까지 던져주는 영화다.

유럽에서 김기덕 감독은 축구스타 박지성보다 더 유명하다. 아니,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 사람’이란 표현도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의 영화가 칸·베를린·베니스 등 유럽 주요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많은 유럽 사람들이 한국영화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2000년 ‘섬’으로 미국 선댄스영화제 월드시네마상, 벨기에 브뤼셀국제판타스틱영화제 대상을 차지하면서 김기덕 감독은 전 유럽에서 인기를 얻었다. 덕분에 이탈리아에선 2003년부터 매년 3월 피렌체에서 한국영화제가 열리게 됐고,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이 영화제는 올해로 14회를 맞는다.

그래서 2007년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김기덕 감독을 모르는 한국 사람이 너무 많아 깜짝 놀랐다. 아내와 함께 ‘비몽’(2008)과 ‘피에타’(2012)를 보러 극장에 갔을 때도 객석은 드문드문 비어 있었다. 유럽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김기덕 감독 영화의 상영관은 꽉 차는 게 당연한 일이니까.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도 개봉 당시 한국 관객 수는 3만 명밖에 안 됐지만,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각각 20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한국 친구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한국 관객들은 독립영화·예술영화를 낯설게 느끼는 것 같다. 동네마다 예술영화 전용관이 있는 유럽과 달리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아 더 어렵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영화가 흥행하려면 광고·마케팅의 힘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 그런데 김기덕 감독과 같은 예술영화 감독들은 큰 비용을 들여 영화를 홍보하기가 힘들다. 더구나 김기덕 감독의 영화엔 한국 관객이 불편하게 느낄 만한 요소도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한국 예술영화의 매력에 빠져 있는 많은 유럽 사람들이 지금 상황을 알면 아주 아쉬워할 게 틀림없다. 좋은 영화가 계속해서 만들어지려면 영화제 수상만큼이나 계속해서 관객이 들고 투자를 받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영화사와 연출자들도 용기를 얻어 더 모험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을 만들 수 있다. 만약 한국영화의 저변이 더욱 확장된다면 또 하나의 한류가 꽃피지 않을까. 어쩌면 아시아와 남미에서 ‘K-POP’이 누리는 그 이상의 인기를 끌게 될 지도 모른다.

글=알베르토 몬디. 맥주와 자동차에 이어 이제는 이탈리아 문화까지 영업하는 JTBC ‘비정상회담’ 마성의 알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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